12주간의 묵상
제4주간 첫째 날 (7.16.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에제 16,1-14
본문 : 예루살렘의 역사 : 나의 교직생활 전반기(20)
1 주님이 나에게 말씀을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았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의 자라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예루살렘의 역사 : 나의 교직생활 전반기(20)
이집트의 강대국에서 종살이 하는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불러내어 당신과 계약을 맺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여주신 하느님! 광야생활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한 후 다윗 임금 때에 이르러 주변의 어떤 나라보다 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들은 번번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이방신을 따라가서 하느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명성이나 영화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무조건 감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정결을 지켜야 하는데 늘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느님을 배반하는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진노는 그들이 누렸던 영화를 거두고 주변 강대국의 속국이 되게 한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쓰게 하실까? 궁금하지만 날이 밝고 아침기도를 하고 미사를 드리기 전에 12주간의 묵상 본문을 읽으며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면 불현 듯 떠오르는 영상들이 있다. 오늘은 보잘 것 없었던 내가 주님의 은총으로 중등학교 교사가 되어 걸어왔던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건만 열두 살 어린나이에 바다에서 당한 익사사고를 통하여 선생님이 되는 꿈을 갖게 하였다. 시골에서 대학진학이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숫한 파고를 넘어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스물네 살에 시작된 교직의 길, 오직 한 길을 천직으로 예순 살 명예퇴직에 이르기까지 37년의 교직 생애를 돌아본다.
78년 2월 제주대학을 졸업하였다. 국립사대 졸업생은 공립학교에 자리가 나는 대로 대학 성적순으로 발령이 나던 때였다. 가정교육과 1등으로 졸업하였기 때문에 제주에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홍 선생님이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게 되자 산가기간 동안 임시교사로 근무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당시에는 산가강사를 개별적으로 구하던 때다. 정식 발령이 나기 전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대답을 하고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함덕 상업고등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근무하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등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남녀 공학이고 특히 고3 교실에 들어가는 것은 겁나는 일이었지만 2개월이란 유효기간이 있어서 참고 견디면 되었다. 그런대로 재미있고 즐겁게 학교 근무를 마쳤는데 5월 1일이 되고 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난 대책 없이 발령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타 지역으로 발령 신청을 한 친구들은 정식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곰곰 생각하다가 제주도 교육청으로 갔다. 가서 직접 인사과장을 만나서 내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만일 제주도에 자리가 없으면 타 지역으로 가서 근무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인사과장은 집에 가서 기다리면 통지를 해 주겠다고 하였다.
며칠 후에 도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다. 5월 15일자 서귀포 지역에 있는 효돈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였던지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다. 직접 찾아가지 않고 마냥 기다리기만 했으면 제때에 발령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선생님이 되었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효돈 가서 학교 주변에 방을 얻었다. 자취방은 중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주인 집 아들은 효돈 중학교 재학생이다. 기거할 곳을 마련하고 첫 출근할 때 입을 옷을 장만하였다. 그때는 기성복 시대가 아니고 옷을 양장점에서 맞춰 입는 때였다. 산가강사로 근무하였더니 수고비로 선생님께서 당신의 월급 일부를 떼어 주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양장점에 가서 보라색 투피스와 옅은 보라색 블라우스로 정장을 맞추고 신발과 가방을 샀다. 머리 손질을 하고 내일 학교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보니 엎치락뒤치락 잠도 오지 않았다.
78년 5월 15일 스승의 날! 효돈 중학교 교문을 통과하여 측백나무 가로수 길을 한참 걸어서 들어가니 한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아담한 학교가 나온다. 그날의 감격은 흥분과 떨림 그 자체였다. 대부분 3월 1일자 발령이 난 상태였고, 추가 발령인 나는 인사말을 혼자 할 수밖에 없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 운동장에 학생들을 집합시켜 스승의 날 행사 겸 부임한 선생님을 소개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난 너무나 떨려서 무슨 말을 하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사말을 하고 교무실로 들어오자 3학년 부장선생님이 우리학교 총각 선생님이 9명인데 처녀선생은 이 선생 혼자다. 총각선생님들이 눈독을 들일 터이니 골라잡으라고 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그때 난 이미 남편 바오로와 열애 중이었다.
중학교 2학년 국어과목과 한문과목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상치교과도 가르칠 수 있는 때였다. 가정 과목은 시수가 적었고 담당교사가 있었다. 그날부터 전공이 아닌 교과를 가르쳐야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또 연구하였다. 다행히 도서관 업무를 담당하게 되어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었기에 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공부하였다. 당시에는 학력경시대회와 전국 고전 독후감 대회가 있었는데 그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젊었고 오직 학교업무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가르치고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학교 일은 정성을 투입한 만큼 좋은 열매를 맺는다. 학력경시대회에서는 내가 가르친 학급 학생들 성적이 남제주군에서 일등을 하였고, 고전독후 감상문 모집에서는 우리학급이 전국에서 최우수 학급으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교사 첫 해에 남제주군 교육장 표창을 받았다.
담임교사로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보였고 대학생활을 하며 중학교 학생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었기에 국어는 물론 영어, 수학까지 가르쳤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가정사정과 학습능력을 키우기 위한 개별 상담 활동을 수시로 하였다. 아침 8시까지 교실에 입실하면 무조건 학급문고를 조례시간까지 읽게 하였다. 아이들은 순수하여 가르침에 잘 따랐다. 담당 학생들은 여학생 63명이었는데 담임교사의 말에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제자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대학교에 진학하여 가능하면 배움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늘 강조하였다.
대학생활 4년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행복,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교수님들의 학문적 지식과 인격, 도시에서 자란 엘리트 인격을 갖춘 좋은 친구들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던 좋은 분들, 이 모든 추억 때문에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가 있었다. 그때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국어선생 2명, 수학선생, 간호사, 초등교사 등 7명이 대학에 진학하였으니 놀라운 일이다. 다음 해에는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도 아이들에게 독서교육을 강조하였고 꿈과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여자도 할 수만 있으면 대학진학을 하여 배움의 기회를 넓혀야 한다고 말하였다. 요즘은 대학교육이 일반화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대학까지 진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결심과 실력, 집안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80년 1월 5일 3년 동안의 연애를 마감하고 바오로와 결혼하였다. 바오로는 대학졸업 이전에 삼성공채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서울과 제주에서 주말부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하루는 경기도에서 근무하는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경기도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자신은 결혼할 사람이 제주에 있는데 서로 맞바꾸자는 것이다. 그때는 교사들이 도간 교류하려면 당사자끼리 맞바꿀 수가 있었다.
80년 3월 1일, 후배는 제주도로 나는 경기도로 도간 전출을 하게 된다. 후배가 근무하고 있던 안성여중으로 발령이 났다. 남편이 서울에서 근무를 하고 시동생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녀야하기 때문에 서울에 거처를 정할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안성으로 다니며 중학교 1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고 그해에 임신을 하여 12월에 첫 딸을 낳았다. 다음 해에 중3 담임을 하였는데 당시 안성여중은 교육부 지정 생활관 시범학교였다. 주당 수업시수가 27시간, 토요일까지 근무할 때 하루 평균 4-5시간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3학년 7개 학급을 20명씩 조를 편성하여 예절 지도를 하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 학부모를 초대하여 큰절을 올리고 식사를 대접하는 프로그램의 주무가 되었다. 가정과 교사들이 번갈아 가며 담당하였는데 정말 힘이 들었다. 초과 근무 수당도 없을 때, 낮에는 수업, 담임업무, 밤에는 생활관 업무에 혹사를 당하였다. 4년이 되던 해에 몸에 이상이 생겼다. 밤낮으로 목을 썼기 때문에 목 쉰 소리가 나오고 급기야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성악을 전공했던 음악 선생님이 내 목소리가 이상하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다. 결근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여 방학 때를 기다렸는데 목이 너무나 아프고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다. 검진결과 후두결절이 생겼다며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교장 선생님께 사표를 내겠다고 했더니 교장 선생님이 이런 일로 사표를 내는 것은 아니라며 웃으셨다. 강사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동료교사들이 한 달간 수업을 대신해 주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처음으로 수술을 받았다.
안성여중에서 5년 근무하는 동안 82년 6월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첫 딸은 12월 겨울 방학 직전에 아들은 6월 말 여름방학 직전에 낳았기 때문에 출산하기 전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방학기간 중에 아이를 낳고 몸조리 한 달하면 바로 출근하였다. 두 아이를 낳고도 산가를 받지 못하였다. 매일 서울에서 안성까지 출퇴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주 힘이 들 때는 안성에서 자취를 하는 동료 집에서 하룻밤씩 쉬곤 하였다. 서초동과 방배동에서 살면서 아침 6시 40분에 강남 고속 터미널로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안성 터미널에 내리면 10분 정도 도보로 걸어야 학교에 갈 수가 있다. 5년 근무하는 동안 결근 없이 줄기차게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성장과정에서 길러진 강인한 체력 때문일 것이다. 남자 선생님도 3년 장거리 출근하고는 병이 나서 못 다니겠다며 나에게 당신의 몸은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아기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면서 장거리 출근을 계속하는 거냐고 말했다.
안성 여중에서 근무하던 83년도에 1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서울대학교에서 받게 되었다. 82년에 자격 연수가 나왔으나 둘째를 낳게 되어서 연수를 1년 뒤로 연기한 것이다. 대학교 때 가정과 교수들은 대부분 서울대 박사 또는 석사 출신들이어서 서울대 교수들이 쓴 교재로 공부를 하였는데 직접 저자에게 수업을 받고 서울 경기지역 가정과 교사들이 함께 연수를 듣게 되어서 공부하는 맛과 재미가 있었다. 아이가 둘이고 집안 살림도 힘이 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다. 1정 자격 연수 성적은 중요한데 경기도 교사 중에 1등을 한 것이다. 기적과 같은 일이다. 도교육청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장학사가 직접 백령도에 가서 근무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까지 하였다. 도서벽지에서 3년만 근무하면 나중에 교장이 되는데 많은 점수를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과 시동생, 아이들을 두고 백령도에 가서 근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성여중에서 열심히 근무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교육감 상을 받았다.
85년 3월 10일, 안양 서여중으로 발령을 받는다. 집은 방배동에서 광명으로 옮겼다. 허름한 집을 사서 재건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두 아이를 제주도 시댁으로 보내고, 우리 부부는 낮에는 학교 근무 저녁에는 일꾼들의 수발을 들어가며 3개월의 공사를 마치고 안정적으로 생활하게 되자 아이들을 다시 데려왔다. 서여중 오던 해에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고, 다음 해에도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는데 86년 3월 막내딸을 낳게 되어 아이가 세 명이 되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슬로건 아래 셋째 아이를 낳으면 미개인 원시인이라고 놀리던 때다. 그렇지만 용기백배하여 셋째 아이를 낳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만약 셋째가 없었다면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아마 우울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86년 3월 1일, 도교육청에서 인사담당 장학관을 하셨던 분(백령도에 가서 근무할 것을 권하였던)이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셨다. 교장 선생님은 정말 좋은 성품을 가지셨고, 부지런하고 선생님과 학생들을 사랑하고 교육에 열정이 많은 분이셨다. 또 선생님들과 소통하려고 월별로 생일이 있는 분들을 모아 식사를 같이하고 맥주를 한 잔씩하며 교장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나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게 하였다. 그때 나이가 서른둘이었으니 어른들 앞에서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할 때다.
그런데 선배 선생님께서 교장 선생님께 “이 선생이 서여중에 온 것은 2년 밖에는 되지 않지만, 어린 아이 셋을 키우면서 광명에서 이곳까지 출근하고 있으니, 교장 선생님께서 도와줄 수 있다면 이 선생님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광명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을 낼 수 있도록 힘을 써주십시오.” 하고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대변해 주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이 선생님은 일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가르치니 다음 해에는 중3 담임을 맡기고 싶었다면서 고 선생님 말이 맞느냐며 정 그렇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잔에 들어있는 맥주를 다 마셔보라고 하는 것이다. 난 맥주나 소주를 전혀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는데 맥주 한 컵은 마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꿀떡 마셨다. 교장 선생님은 알았다고 하시며 그 말씀을 염두에 두셨고 발령시기가 되자 안타깝지만 내신을 쓰라고 하였다. 정말 고마운 분이시다. 그분은 교직생활 중간 중간 만나서 인사도 드리고 근황도 살폈다. 그리고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하신 분이다. 내가 교장을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억울하다면서 늘 안타까워하였다. 몇 년 전 소식으로는 몸이 안 좋으시다 하였는데 지금은 어떠하신지 궁금하다.
그렇게 하여 87년 3월 1일자로 광명에 있는 광명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새로운 부임지로 올 때 교장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여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 나를 칭찬해 주면서 어린 아이가 세 명이니 배려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교장 선생님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였고, 자제분 3명이 결혼식 때 빠짐없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천주교 신자이다. 내가 개신교 신자로서 열심히 사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광명여고로 가면서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기뻐하였다.
87년 첫 해에는 고2 담임을 하였다. 또한 가정과 교과 이외에 지리와 세계사를 가르치게 되어 또 다시 새로운 교과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서른세 살이었으니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었다.
88년부터 91년까지 4년간은 고3 담임을 하였다. 그때부터 아침 조례시간과 수업시작 전에 간단하게 학생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잘 따라주었다. 수업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처음에는 개신교에 다니는 동료들끼리 신우회를 조직하여 아침 일과 전에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87년 천주교로 개종하고 난 후에는 신우회 모임이 시들해졌다. 천주교 신자들이 새롭게 모여 퇴근 후에 우리 집에서 묵주기도 5단을 공동으로 바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그 덕분에 많은 분들이 냉담을 풀었고,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많은 분들이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교장 선생님, 후에 교장 선생님이 된 분도 세례를 받았고, 동료교사와 제자 포함 다섯 명의 대녀가 생겼다.
92년 6년째가 되던 해에는 그동안 고3 담임하느라 고생하였다면서 담임에서 제외시키고 학생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수없이 많은 문제를 가진 학생들을 상담하며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위로하면서 아이들과 더욱 좋은 관계를 맺었다. 이런 활동이 인정되어 교육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광명여고에서 동료교사들과 맺어진 인연은 지금까지 ‘순수 마리아’ 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정말 내 마음 깊이 간직한 보석처럼 귀한 분들이다.
여고 교장 선생님은 아이가 셋인 나를 언제나 위로하고 힘을 주고 수업시간도 배려해 주었다. 우리 아이들도 집과 학교가 가까워서 엄마가 다니는 학교를 좋아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얼른 달려갈 수 있어서 아이들을 편하게 키울 수 있었다. 남편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테니스코트에 나와서 테니스를 쳤다. 여고에서 6년은 교직생활과 신앙생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93년 3월 1일 광명여고에서 6년간의 재임을 마치고 광명여중으로 발령을 받았다. 큰 딸도 어느 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일학년이 되었다. 광명여중은 집과 거리가 좀 있었지만 아이들이 다 커서 근무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광명 여중 첫 해에 중2 담임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1학년부장, 다음 새마을 부장, 3년 차에는 2학년 부장을 하며 많은 일을 하였다. 마지막 해에는 가정과 시수가 줄어들면서 중학교 1학년, 2학년 생물을 가르치게 되었다. 어릴 적에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면서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하였던 것이 그때 빛을 발하였다. 교감 선생님이 생물을 전공하신 분이신데 나의 수업을 지켜보면 전공자보다 더 세심하고 사실적으로 가르친다며 칭찬해 주었다. 가급적이면 학생들에게 실물교육을 시켰다. 직접 산에 가서 솔방울도 주어오고, 이끼도 캐어오고, 개구리 해부와 오징어 해부도 직접하고 신나게 살아있는 수업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명에서 10년을 근무하게 되었고 인사 규정상 타 지역으로 전보내신을 하여야 했다.
광명여중 근무 마지막 해에 중학교 교육과정에서 가정과 시수가 줄어들자 다른 교과 부전공 연수를 받도록 하였다. 환경이 중요하게 부상되던 시기여서 중학교에 환경교과가 신설이 되면 가르칠 교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96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280시간 연수를 받으면 환경교사 2급 자격증을 주었다. 이화여대에서 전국에 있는 환경부전공 자격을 희망 하는 교사 150명이 모였다. 그때에 다시 한 번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화학, 생물, 지질, 지형, 지구과학 등을 공부하는데 난 자연계 특질이 있어서 공부하는 내용들을 잘 알아듣고 시험문제를 내주면 답안을 미리 작성하여 함께 공부하는 분들과 공유하곤 하였다. 그런데 연수를 마치면 연수생들 중 1등에게 이화여대 총장상을 수여하는데 내가 그 상을 받은 것이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선생님들이 당신이 1등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축하해 주었다. 덕분에 공영 TV에 나가서 환경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추억이다
광명에서 10년은 신앙생활, 교직생활, 가정생활이 안정되고 탄탄하게 뿌리는 내리는 시기였다. 교사로서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신명나게 근무할 수 있었던 인생 최대의 전성기였다. 매 순간 주님의 손길과 은총과 축복이 개인과 가정을 성장시키고 성숙시켰다. 37년 교직 생활을 한꺼번에 다 쓰려니 힘들다. 효돈 2년 안성 5년 서여중 2년 광명여고 6년 광명여중 4년, 19년의 교직생활 전반기를 매듭을 짓고, 다음 기회에 나머지를 정리하여 보자. 오늘은 이상 끝!!
하느님께 무한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제가 걸어왔던 길 위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하였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 혹시 저의 교만이나 위선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무지와 어둠과 죄악 중에도 언제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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