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간의 묵상
제4주간 셋째 날 (7.17.연중 제15주간 화요일) : 로마 1,18-31
본문 :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 : 나의 교직생활 후반기(21)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변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26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7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 : 나의 교직생활 후반기(21)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에 대하여 위와 같이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인간은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사람과 동식물, 계절의 변화와 모든 사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였기에 그들이 하느님을 모른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 오늘 지난 온 교직생활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안배였고 은총이다. 물론 그때그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였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으로 나의 능력에서 벗어난 수많은 일들을 수행하였음을 고백하였지만 교직을 떠나 그 뒤안길을 새롭게 조망하는 지금 또 다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이다.
96년 10월 28일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몇 달 동안은 안양에서 광명여중으로 출퇴근하였다. 큰 딸은 안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아들은 광일 중에서 범계 중학교로, 막내는 광일 초에서 범계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97년 3월 1일, 안양 신안중학교로 전입하였다. 수리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남자 중학교다. 그전에 바로 위에 있는 서여중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친정집 가까이 온 느낌이다. 3월에는 비담임으로 출발하였지만 5월 1일부터 학교마다 정보교육부장이 신설되었다. 광명여중에서 컴퓨터 관련 연수를 180시간 받았기 때문에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터였다. 교감 선생님이 부르셔서 정보부장을 하라고 명하였다. 담임이 없는 상황이고 그만큼 컴퓨터 연수를 받은 사람도 없으니 새로운 업무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정보부장에 임명되었고, 학교의 모든 전산화 작업의 기초를 놓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대중 정권에서 전자 정부를 강조하면서 모든 학교에 인터넷을 가설하고 중학교 과정에서 컴퓨터 과목을 신설하였다.
98년 3월 1일부터 안양대학교 대학원 컴퓨터 교육학과에 등록하였다. 정보부장들이 대거 몰려왔다. 전공자들이 일선학교에 배치되기에는 역부족하였고 경력교사들이 정보업무를 담당해야하기 때문에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컴퓨터 관련 지식을 쌓아야 할 판국이다. 졸업 후에는 정보 컴퓨터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우선 교무실 중앙에 놓여있던 아무도 쓰지 않는 486 컴퓨터를 수리하여 시험문제와 기안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98년부터는 각 학급마다 486 컴퓨터가 들어왔다. 일반 선생님들에게 컴퓨터 사용하는 방법, 문서 작성하는 방법, 프리젠테이션 작성법, 엑셀 사용법, 인터넷 사용법을 가르쳐야 했다. 내가 직접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삼성전자, 엘지전자 서비스 센터를 이용하여 동료교사들을 인솔하여 다니면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99년과 2000년에는 경기도 교육청 지정 교단선진화 시범학교 운영을 하게 되어 학교 내에 전산망을 설치하고 수업에 컴퓨터를 활용하게 하였다. 그때 정말 수업과 학교업무,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눈 코 틀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런 와중에 시동생의 외국 출장 중 안전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마음도 몸도 쉴 수 없는 상태였다. 2년간의 시범학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보업무도 익숙해질 즈음 관리자분들이 내게 승진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였다.
교단선진화 시범학교를 마친 후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동료교사들이 추천으로 국무총리가 임명하는 모범 공무원 상을 받았고, 매월 3만원씩 2년간 성과급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승진반영 점수도 꽤 되었다. 정보부장으로 5년 임기를 채웠을 때 신교장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는데 왜 이 부장은 정보 부장만 계속하는 것이냐며 3학년 부장으로 임명하였다.
2002년 3학년은 남자학급 10반이었다. 복학생들을 대거 포함하여 생활지도가 어려워서 날마다 문제 학생을 놓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고가 펑펑 터지곤 하였다. 문제 학생 명단 33명을 수첩에 적고 매일 미사 제단에 올리며 주님께 그들을 붙잡아 달라고 애걸복걸 기도에 의지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리아 선생님을 인정하면서 마음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 해 고등학교 입시에서 졸업생 전원을 합격시켰던 일과 그 말썽쟁이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졸업여행을 다녀온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졸업여행에서 특수반(마리아 군단 33명) 녀석들이 갑자기 단상 위로 올라와 나를 헹가래를 띄우며 자신들을 돌보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때 눈물이 쏟아졌다.
2003년에는 교무부장을 소임을 받았다. 남자학교에서 여교사가 교무부장을 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었으나 신교장 선생님이 나를 믿고 적극 지원하여서 1년간 무리 없이 교무부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안양 교육청 관내 가정과 장학위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중3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통예절 동아리를 만들어 매 주 예절을 가르치고 안양 예절관에 의뢰하여 관 혼 상 제의 전통의례를 배우게 하였다. 그리고 관내 가정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수업 발표를 하고, 요청이 있을 시는 해당학교에 가서 수업지도를 하였다.
신안 중학교에서의 7년은 관리자와 동료교사,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받으며 교사로서의 모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학교운영교사위원을 하였기 때문에 학부모님들의 학교에 대한 의견 수렴은 물론 건의 사항들도 해결할 수 있었다. 7년 임기를 마쳤을 때 교장 선생님께서 감사장을 주었고, 또 학교운영위원회에서는 공로패를 주었다.
2003년 12월 3일부터 12일까지는 그동안의 교육공로가 인정되어 경기도 중등교사로서 자비부담 없이 캐나다와 미국의 선진학교를 탐방하였고, 캐나다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와 CN타워, 미국의 서부 그랜드캐년, 로스엔젤리스의 헐리우드,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나스베가스 등을 둘러볼 수 있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그랜드캐년이 보고 싶었는데 주님께서 기회를 주었다.
2004년 3월 1일 군포 관내 궁내 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부임 후 첫 인사에서 궁내 중학교를 천국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포부를 밝히자 동료교사들이 코웃음을 쳤다. 이전 교장 선생님이 여러 가지 비행으로 좌천되었고 선생님들은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교무실 분위기가 썰렁했다. 사실 신안에서 옮겨올 때 군포 관내 어떤 학교라도 좋은데 궁내중학교는 가면 안 된다고 모두가 걱정을 하였는데, 궁내중학교로 배정을 받은 것이다. 3월 2일 첫 출근을 하고 주차를 한 후 수리산을 바라보며 주님! 제가 문제가 많은 이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요? 라고 마음속 질문을 드렸을 때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내가 도와줄게.” 하는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아하!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이곳에서 천국을 만들어보자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부임 첫 해, 정보부장이 전출된 상황이어서 바로 정보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교실마다 랜 선을 새롭게 가설하는 것부터 낡은 컴퓨터 처리, 새로운 선진화 설비까지 눈 코 틀 새 없는 업무가 또 시작되었다. 오직 주님께 부르짖으며 모든 업무를 감당하였다. 현교장 선생님과 동료교사들이 적극 추천으로 다음 해에 교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005년부터 3년간 계속 궁내에서 교무부장을 하였다. 관리자와 동료교사들과 코드가 잘 맞았다. 교사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어느 새 경력자로서 관록이 붙었다. 2006년에는 봉사활동 시범학교 운영을 하게 되었고, 2007년에는 경기도 교육청 지정 다문화 시범학교의 주무를 맞게 되었다. 교무부장이 교육과정 업무까지 총괄하였기 때문에 힘은 들었지만 일처리를 일사분란하게 할 수 있었다. 우선 외국 생활 경험이 많은 학부모들에게 외국 문화, 정치, 지리적 배경과 문화적 특성을 수업에 반영하도록 하였다. 당시 궁내 중학교 학부모들은 외국에서 살았던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았고, 일본에서 태어나서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궁내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있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데 협조를 받을 수가 있었다.
학급 신문, 동아리 활동, 체육대회, 합창대회, 창의적 재량 수업에서 외국 문화를 반영하도록 하였는데 하는 행사마다 예상 이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다문화 활용 수업을 하는데 선생님, 학생, 학부모가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다. 일 년 동안의 학교교육과정을 잘 구성하여 전국 100대 교육과정에 다문화 교육과정 프로그램을 제출하였다. 군포교육청, 경기도교육청, 교육부의 심사를 거쳐 당당하게 100대 교육과정 최우수 학교로 선정되었다. 100대 교육과정 우수교원으로 공로가 인정되어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고, 중국 상하이 선진 학교 시찰을 할 수 있는 포상을 받았다. 그해 겨울 중국 상하이와 소주, 무주 일대의 우수학교 탐방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전 교장선생님 또한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인품과 성격이 좋았고, 박사 학위를 소지한 분으로 실력이 있었다.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 학생과 교사들을 존중하는 마음은 유별하였다. 장학사를 거쳐 젊은 나이에 교장이 되었고 신앙심도 있어서 늘 겸손하고 기쁘게 일을 하였다. 수고하는 교사들에 대하여는 자비를 털어서 밥을 사주고 용기를 주었던 분이다. 궁내 중학교에서 교무부장을 더 할 수도 있었지만 동료교사 중에 승진 가산점이 필요한 분이 있어서 의논한 끝에 내가 다른 학교로 옮겨 갈 생각을 하였다.
어느 날 남편과 모락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아담하고 예쁜 학교가 지어지고 있었다. 공사하는 현장에 들어가서 이곳에 무슨 학교가 세워지냐고 하였더니 중학교를 짓고 있는데 가칭 오전 중학교라고 하였다. 그날 어찌된 영문인지 내년에는 꼭 새로 신설된 이 학교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기도에 들어갔다. 그해 가을 궁내 중에 교육장님이 방문하셨다. 군포에 와서도 관내 학교의 교육과정 지도위원을 하였기 때문에 교육장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개별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다며 내년에 신설되는 오전 중에 근무하고 싶은데 발령을 내주시면 제가 신설업무를 담당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교육장님이 황당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겨울 방학 1월 초에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다. 정말 이 선생이 모락 중학교 (학교명이 정해졌음) 교무부장을 할 수 있느냐? 겨울방학 없이 신설업무를 추진해야 하는데 가능하냐? 생각이 있으면 교육청으로 나오라고 호출하였다. 당장 달려갔다. 이것저것 필요한 사항을 전달받고 의왕중학교 도서실에 장소를 빌려 그날부터 모락 중 신설업무를 추진하였다. 그해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2월에는 궁내 중 졸업 업무와 입학 업무, 모락 중 신설업무와 입학 업무를 하면서 밤 낮 없이 학교일에 몰두하였다. 이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은 남편이다. 의문이 생길 때마다 조언해 주었고 힘과 용기를 주었다.
2008년 3월 1일, 모락산 자락에 위치한 신설 모락 중학교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1월에서 2월 말까지 개교 업무를 완료하였고, 3월 초 부임해 오는 선생님들을 맞이하여 학교 건물을 소개하고 교육과정을 설명하면서 마치 내가 학교를 설립하는 기분으로 모든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락 중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의 꿈을 펼쳤는데 교훈, 교가, 교목, 교육과정 저변에는 하느님과 성모님의 정신이 깊이 깔려있다. 많은 분들이 그 뜻을 알 리가 없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꿈과 사랑을 주는 모락중학교” 교훈 “자아를 실현하여 세상의 빛이 되자” 교화 장미, 교목은 소나무, 교조는 독수리, 교가의 가사까지 진리와 희망의 빛을 심었다.
2008년 1학년 7개 학급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교장 교감을 포함하여 신설 맴버가 15명이었다. 똘똘 뭉쳐서 한마음 한뜻으로 학생들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새로운 학교의 틀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처음 개교할 때 학교 부지 때문에 교육청과 법무부 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힘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자로 마을 아침 7시 미사는 학교를 위하여 봉헌하였다. 주님께서 모락 중학교 교무부장이시고 난 주님이 손과 발이 되어 움직였다. 미사 후 학교와 학생, 교직원과 학부모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날마다 걸었다. 주님의 은총으로 학교는 날로 발전하고 안정되어 갔다.
개교 원년에 펼쳤던 교육활동을 엮어 전국 100대 교육과정에 응모하였고, 최우수 학교로 선정되어 전국적으로 모락 중학교가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개교 첫 해에 의왕시가 공모한 우수교육프로그램에 당첨되어 25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문예창작반과 과학영재반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활동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문예창작반과 과학영재반 학생들 50명과 지도교사를 포함하여 60명이 제주도 2박 3일 탐사하면서 제주도의 지질과 지형, 제주문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사실 제주인인 나도 제주도를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이때 함께 일했던 교장 교감을 비롯한 교육동지들을 잊을 수가 없다.
기도의 힘이 크게 작용하면서 냉담자가 회두하고 새로운 신자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한 때 천주교 신자가 18명에 달하였다. 라파엘라, 베로니카, 모니카, 안나마리, 오틸리아, 데레사 등 대녀들도 많아 졌다.
2년간 교무부장을 하며 승진할 기회를 찾았으나 누적 점수가 부족하여 더 이상 승진할 수 없게 되자 교장 선생님께서 새로 생긴 수석교사에 지원할 것을 권하였다. 수석교사는 교사들의 수업 개선을 위한 수업 코칭이 주요 업무이다. 각 학교마다 한 명씩 배치하여 교사들의 수업을 컨설팅하고 수업 코칭을 하여 교실수업을 개선하겠다는 교육부 방침이다. 시범 운영을 4년간 실시한 후 정식 제도화가 되었다. 시범 운영 기간 중 2년간을 수석교사로 활동하였다. 중간에 학생부장을 1년 하였는데 학교폭력이 급부상되면서 학생부장을 하려는 교사들이 없었다. 업무는 과다하였고 학생들은 점점 다루기 힘들어져서 모든 교사가 피하고 싶은 업무가 학생부장과 학생부 업무였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 “네가 학생부장을 하여라. 내가 도와주마. 문제 학생들 안에 현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학생부장이 되어줄 것이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업무가 과다하고 학생들을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면서도 교장 선생님께 자원하였다. 만약 주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 어떤 용기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월부터 학교폭력 문제가 빵빵 터져서 매월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열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입장을 헤아려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다. 가해자를 타 학교로 전학을 시키는 문제, 반을 교체하는 문제는 참 어려웠다. 문제아들을 개별적으로 상담하고 기도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한 명 두 명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은 안정되어 갔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문화생활을 하고 교문지도를 하며 존재감을 키워주었을 때 그들도 긍지를 갖고 긍정적으로 변하여 갔다. 간부학생을 중심으로 1년에 두 차례 국사편찬위원회, 청계천역사관, 국회, 청와대를 견학하였다. 당시 함께 일했던 서 선생님, 최 선생님, 이 선생님은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2013학년, 수석교사가 제도화 된 지 2년째가 되는 해이다. 이때 수석교사에 다시 도전하여 엄격한 심사와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 합격하였고, 정식으로 모락 중학교 수석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관리자, 교직원, 학생, 학부모들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인지도가 있어서 수석교사로 활동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교사들이 수업코칭, 문제 학생 상담, 학급에서 생기는 어려운 문제를 수시로 살피고 상담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해결사가 되었다. 교직원들의 친선을 도모하고 애경사를 돌보는 친목회장을 2년간 담당한 것도 수석교사 시절이다.
계속 정년까지 모락 중학교에서 수석교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14년 1월 6일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사명을 주셨다. 어느 날 아침 “이제는 나의 사도가 되어라. 지금까지는 내가 너를 대신하여 담임교사, 부장교사, 수석교사로 37년을 도와주었으니, 이제는 나의 종이 되어 내가 원하는 일을 해주기 바란다.” 하고 말씀하셨다. 난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제가 명예퇴직을 하고 다음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 “하상 신학원 입학하여 선교사가 되어라.” 라고 하셨다. 주저함 없이 하상신학원에 등록하였다. 그래서 2015년 1년을 하상 신학원에서 선교사의 꿈을 키우며 신학을 공부하였다.
2015년 2월 28일 36년 9개월(37년에서 남편 간병휴직 3개월 제외)의 교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모락 중학교에서 7년간 재임하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영광스런 퇴임이었다. 학생 학부모 동료교사들의 뜨거운 환송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2월 23일 명예퇴임식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아들, 며느리, 딸, 시동생이 참석하여 그동안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주었다. 아들이 퇴임식에 와서 보고는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훌륭하게 교직을 마감하는 줄은 몰랐다면서 고맙게 생각하였다. 막내딸과 시동생, 며느리도 영광스런 퇴임식을 보며 아주 기뻐하였고 박수를 쳐주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영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 가운데로 불러내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미움과 증오를 사랑과 감사함으로 변화시켜 주신 나의 하느님! 당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찰 뿐입니다. 이 모든 여정에 하느님, 예수님, 성령님, 성모님과 성인성녀와 수호천사를 비롯한 영적 형제자매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나 온 길을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며 사랑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앞으로의 삶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맡겨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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