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신학(12주간 묵상)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14)

기도하는 어머니 2018. 7. 8. 20:52

12주간의 묵상

 

3주간 첫째 날 (7.7.연중 제13주간 토요일) : 시편 124

 

본문 :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1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2 사람들이 우리를 거슬러 일어났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3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4 물살이 우리를 뒤덮고 급류가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5 거품 뿜는 물살이 우리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6 우리를 저들 이빨의 먹이로 내주지 않으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7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8 우리의 도우심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 (14)

 

사람들이 우리를 거슬러 일어났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물살이 나를 뒤덮고 급류가 목 위로 넘쳐흘렀으리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넜을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노래하였으리라. 누구에게나 그들을 속박하고 억압하는 이집트(죽음의 세계)가 있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널 때(구원)의 긴박함을 체험한다. 나의 인생 여정에서도 죽음의 계곡을 넘어섰던 절박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만일 그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지 않으셨던들, 죽음의 세계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물살이 나를 뒤덮고 :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여자 아이들은 여름이 되면 늘 동네 앞바다를 놀이터로 삼아 물놀이를 하였다. 해녀가 되기 위해 바다 수영을 배우고 익힌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해녀를 생업으로 삼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운명처럼 해녀가 되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을 잘하는 상군은 동네에서 바다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해녀들을 통솔하고 지도한다. 상군은 보통 해녀들보다 물질을 잘하기 때문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더 많은 해산물을 캐낼 수가 있다. 바다는 계절에 관계없이 해녀들을 위해 소라, 전복, 문어, 해삼, 성게, 미역, 우뭇가사리 등을 채워주었고, 해녀들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간다. 딸이나 어머니가 물질을 잘하면 돈도 많이 벌고 자녀들을 교육시킬 재력도 마련하고 밭을 사서 농토를 확장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

 

나는 해녀 상군이 되고 싶었다. 욕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 또래친구들을 제치고 한두 살 언니들과 벗하여 헤엄치는 연습을 하였다. 여름 한 철은 선창가에서 친구들과 수영하며 보낸다. 보리밥에 된장을 말아 먹으며 오전부터 시작된 물질 연습은 저녁 해가 뉘엿뉘엿할 때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에서 살갗이 검게 그을리고 살가죽이 두어 번 벗겨져야 가을을 맞이한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된 물질 연습은 6학년까지 이어지고 중학생이 될 즈음에는 얕은 바다에서 자맥질을 하여 해산물을 캐낼 수가 있다.

 

해녀 상군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또래보다는 먼저 엄마에게 태왁을 마련해 달라고 졸랐다. 5학년 여름 어느 날, 선창가가 아닌 좀 더 깊은 곳으로 나가 물속에서 무언가를 캐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래들은 선창가에서 헤엄치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혼자서 조금 먼 바다로 나간 것이다. 태왁을 의지하여 깊은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밀어닥친 파도에 붙들고 있던 태왁을 놓치고 말았다.

 

거센 물살에 휘말려 중심을 잃고 겁에 질려 허우적거렸다. 물살에 밀려 멀어져 가는 태왁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어림도 없다. 순간 팔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죽음의 올무가 나를 휘감았다. 그대로 빠져 죽는 줄 알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기에 물귀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물속에 한 번 들어가면 그냥 가라앉는 것이 아니고 다시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제야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음 물속에서 올라 올 때는 살려달라고 외쳐보자개구리처럼 고개를 쭈볏이 내밀고 살 려 줍 서!” 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그러자 나보다 다섯 살 가량 나이가 많았던 언니(생명의 은인)가 내가 물에 빠져 죽는 줄 알고 저거 복 먹 엄 쩌~” 하는 큰소리가 들렸다. 그 언니가 나를 구하러 오는 시간에도 나는 계속 물속을 들락거렸다. 언니가 다가와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뭍으로 올라온 나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누군가는 인공호흡을 하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숨을 몰아쉬며 깨어났을 때는 수많은 사람이 나를 에워싸 있었고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어멍 나 물질 하지 않고 선생 허쿠다.” 였다. 물살이 나를 뒤덮고 급류가 목 위로 넘쳐흘렀을 때 주님은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죽음에서 건져냈다. 그날 나는 해녀상군에 대한 꿈을 바다 속에 버렸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리라 다짐하였다. 그날의 꿈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원하였던 선생님, 교사로 한평생 사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힘든 고비가 올 때마다 해녀로 물질하며 사는 것보다 얼마나 편하고 인정받는 삶인가를 생각하며 인내할 수 있었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2가 되면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한 현장학습으로 한라산 등반을 한다. 여름에는 바다 수영, 봄에는 산나물 캐기, 가을에는 땔감 줍기 등으로 훈련된 몸이라 걷는데 자신이 있다. 처음으로 등산을 하였지만 천천히 걸어도 친구들보다 언제나 빠르다. 어리목 야영장에서 보통 1박을 하고 백록담을 보고 난 후에는 올랐던 길과 다른 개미 목으로 내려온다. 정상에 오르면 백록담 물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 손을 담글 수도 있었다. 첫날은 무리 없이 산을 올랐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올 때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칠 줄 몰랐다. 거친 돌과 송이가 물에 젖어서 미끈거려 걷기에도 힘들고 잘못하면 실족하여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가 있다.

 

여전히 앞장서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끄러지면서 계속 아래로 내리달렸다. 몸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그 순간 이렇게 미끄러지면 분명 위험한 상황이 올 것만 같았다. 뒤에 오는 친구들은 그냥 달려가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난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달려 굴러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나무를 붙잡고 쓰러지자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순간 나무가 보였고, 몸을 돌려 나무를 붙잡고 온몸을 던졌다. 속도가 붙었기 때문에 나무를 붙잡는 순간 몸이 다치고 옷이 찢어지면서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상처가 쓰리고 아파서 걷기도 힘들었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하산하였다. 그렇지만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 때문에 아픈 것도 몰랐다. 집에 돌아온 후 몸살이 나서 며칠간 앓아 누웠다.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주님! 그리고 선생님과 친구들을 통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신 주님! 주님께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던들 저는 그날 산 속에 묻혀 영영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노가 타올랐을 때 : 대학교 2학년 때이다. 가정에 위기가 와서 죽으려고 자살 기도를 하였다. 새 어머니는 첫 결혼에 실패하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소박을 맞아 우리 집으로 개가하였다. 아버지와 재혼 한 후 첫째 아들과 딸 셋을 낳았고, 다섯 번째 임신 중이었다. 겨울방학 동안 농사일을 하고 산바라지를 하면 학비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여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2월 초에 부모님이 간절하게 바랐던 둘째 아들을 낳았다. 부모님은 너무나 기뻐하였다. 나도 일한 보람을 느끼며 개학 전까지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동생은 파상풍으로 7일 만에 생명을 잃었다. 부모님은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빠져있었다. 난 등록할 때가 되어도 학비를 마련해 달라고 말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고민만 하다가 용기를 내어 학비 마감날짜가 다가온다고 말씀 드렸는데 어머니는 100원 지폐한 장을 던져주며 나가란다.

 

부모님에 대한 실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겨울 방학 두 달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 울면서 집을 나섰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먹을 것도 누울 곳도 없는 처지가 너무나 비참하였다. 부모님의 무관심은 내가 죽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 죽어버리자. 나 하나쯤 없어져도 별 문제가 없겠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죽을 용기만 남았다. 저녁 무렵 방파제 끝에서 몸을 투신하면 아무도 모르게 난 바다에 수장될 수 있다. 무작정 길을 나서서 방파제를 걸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았더니 앉아있는 곳은 작은 교회였다. 누가 그곳으로 안내하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교회 정면에 나무 십자가가 있었고 십자가가 금빛으로 빛나면서 죽지마라 라는 네 글자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귓가에서 계속 죽지마라하는 소리가 공명처럼 들렸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멈추지 않는 그 소리에 나는 당황하였다. 불교 신자인 내가 교회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서 울렸던 죽지마라가 죽음을 포기하고 죽을힘을 다해 살아보자라는 결심을 하게 하였다. 주님은 나를 옭아맸던 죽음의 그물을 찢어 버렸다.

 

주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나의 마음속 생각과 행동과 형편을 모두 알고 있다. 어떻든 죽음에서 나를 살리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던 주님! 소중한 생명이 그렇게 없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거슬러 일어났을 때 :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되어서는 성령쇄신 운동을 하면서 본당 기도회와 교구 기도회에 열심히 나갔다. 그날은 남편과 한 자매와 함께 율전동 금요 철야 기도회에 가고 있었다. 내가 운전을 하고 남편은 조수석에 자매님은 뒷좌석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제2경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광명터널을 막 지나 안양 쪽으로 60km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쾅~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커다란 승용차가 작은 내차(프라이드)를 들이받은 것이다.

 

순간 브레이크!” 하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본능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고 중앙분리대와 20cm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난 얼른 앞 차의 번호를 확인한 후 조수석 문짝이 다 찌그러져 문도 열 수 없는 상태에서 안양 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그 차의 운전자는 무면허 음주 운전으로 그날 내차를 비롯하여 3대의 차를 들이 받고, 경찰서에 붙잡혀 와 있었다. 여러 가지 조서를 꾸미고 사건 경위서를 작성하느라 기도회도 가지 못하고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3남매가 부모님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꿀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만약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났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될 뻔하였다. 남편과 나는 죽음의 덫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남편은 전날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며 성모님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고 하였다. 차는 박살나서 폐차 처분할 정도였으나 사람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