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신학(12주간 묵상)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0)

기도하는 어머니 2018. 7. 3. 12:26

12주간의 묵상

 

2주간 넷째 날 (7.2.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요한 1,1

 

본문 :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10)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한 처음에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셨다.

 

말씀과 예수님은 동의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셨고 마리아의 아드님으로 인성을 지니신 분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다. 온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후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체가 되게 하신 분이 곧 예수님이다. 당신의 창조하신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자 인간의 몸을 택하시고 구원자가 되어주신 분, 부활 후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의 모습으로 인간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 태초에 말씀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모든 생명의 아버지이며 근원이다.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이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얻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인간들이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아 주고자 함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하느님을 배반하고 죄의 유혹에 넘어가 에덴을 잃어버리게 되었지만 당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의 생, , , 사를 그냥 보고 있을 분이 아니다. 고통과 죽음의 질곡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다.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어둠인 인간 세상 안으로 오셨다.

 

12주간의 묵상을 날마다 글로 쓰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묵상 전에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묵상 후 자판기를 두드리면 글이 글을 만들어 간다.

 

새벽 미사 후 성체조배를 하는데 안양에 삶의 둥지를 틀게 된 과정이 분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삶의 자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것임을 고백한다.

 

8015(첫 토요일, 성모님의 날) 구좌읍 세화 중앙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17일 제주를 떠나 남편과 함께 부산을 거쳐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110일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남편이 먼저 서울에 와서 신혼집을 빌렸는데 돈이 얼마나 궁하였는지 낮에는 부동산 가게를 하고 저녁에는 주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홀이 달린 단칸방이다. 방에 달린 조그만 부엌에는 살림도구도 들여놓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브자리, 살림도구 하나도 없이 가방하나 가지고 사글셋방에 도착하였으니 정말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신혼부부다.

남편은 회사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당장 남편이 저녁에 돌아오면 밥상을 차려야 되는 상황이다. 가재도구가 하나도 없다. 수중에 가진 돈이라곤 부산에 들렸을 때 이모와 외삼촌이 건네 준 오만 원 정도의 현금이 전부였다. 그래도 5만원을 들고 개봉동 시장을 찾아 나섰다. 당장 필요한 석유곤로, 밥솥,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국그릇과 소반을 하나 장만하고 봉지쌀과 콩나물, 두부, 고등어 한 마리와 된장을 조금 사서 왔다. 날씨도 너무나 추워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부산을 떨며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에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렸다. 당시에는 어디에 가서 사 먹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남편은 밥상을 쳐다보면서 어디서 이 모든 것들을 장만하였느냐며 사랑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왈칵 끌어안아 주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고향을 떠나 눈물 젖은 빵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다.

 

서울에서의 삶은 대학입시로 112일 서울에 상경한 시동생과 함께 개봉동 좁은 방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날 부산 어머니가 보내준 이브자리를 찾아왔는데 이불 두 개를 깔아 놓으면 앉은 자리도 없는 작은 방이다. 그곳에서 남편과 나, 시동생이 3개월을 같이 살았다. 그리고 3월 신학기에 난 제주 서귀 효돈 중에서 경기 안성 여중으로 도간 전출하여 개봉동에서 안성여중까지 출퇴근 하였다. 개봉동에서 구로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수원행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 도착하여 안성으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타야했다. 무려 출근 시간이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왕복 4시간씩 걸려서 2개월 정도 다닌 것이다.

 

그러다가 서울시 강남구 서초동 말죽거리 은광 여고 앞 빌라 주택 지하층으로 이사를 하였다. 비가 오면 지하층이어서 부엌에 물이 차올랐다. 그런 환경에서 첫 아이를 가졌고, 서초동에서 영등포 가는 36번 버스를 타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안성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10개월을 다녔다. 그때의 36번 버스는 초만원버스로 임산한 몸으로 다니기에는 무리였다.

 

그 후 방배동 삼호아파트 뒤 2층집으로 이사를 하여 8012월에 큰 딸을 낳고 제주에서 시할머니가 올라와 아이를 돌봐주었다. 난 여전히 안성여중으로 출퇴근 하였다. 그 집에서 또 16개월 터울로 둘째 아들을 낳았다. 처음에 전세 2백만 원이었는데 2년마다 재계약을 하였고 그때마다 곱절로 전세가 올라 4백만 원 전세가 되었다. 할머니, 시동생, 두 아이, 남편과 나 여섯 식구가 그 집에서 사는 것은 너무나 비좁아 방배동 가야병원 뒤에 있는 이층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의 전세금이 8백만 원이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벌어서 한 사람의 월급 20만 원을 부산에 계신 어머니께 곗돈으로 보내드렸다. 그 집에서도 역시 2년마다 전세금을 2백만 원씩 올려서 나중에는 전세금 마련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동안 주택적금을 들었던 통장을 매매하고 전세를 끼고 34백만 원을 주고 광명시 광명6동에 둥지를 틀었다. 허름한 집을 사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개축을 하였다. 집을 수리하는 동안 두 아이는 제주에 내려가 있었다. 남편과 나는 낮에는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오면 일꾼들 밥을 해주며 3개월 정도 걸려서 집을 전부 수리하였다. 처음으로 수리했을 때는 그 집이 얼마나 넓었는지, 그리고 난 이층집 주인이 된 것이다. 이때에 근무한 학교는 안양 서여중이다. 광명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안양역까지 와서 안양역에서 선생님들과 봉고차를 카풀해서 학교에 갔다. 서여중 근무할 때 86년 3월 막내가 태어났다.

 

서 여중에서 85, 862년을 근무하고 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광명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광명 여자고등학교로 전근하였다. 학교와 집이 가까이 있어서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아주 좋았다. 당시 여고 교장 선생님께서는 어린 아이가 셋인 나에게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광명여고에 근무할 때 믿음이 좋은 동료들이 많아서 아침마다 잠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87년 여름 방학에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모임이 시들해졌고, 냉담했던 교우들이 하나씩 회두하여 천주교로 돌아왔다. 이때 정말 많은 이들이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족을 포함 무려 25명 정도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광명여고에서 6년을 근무 후 연한이 다 되어 광명여중으로 전근을 갔다.

 

신앙생활은 8842일 세례를 받은 후 전례부, 성령기도회, 푸른군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각 가정마다 순례하던 파티마 성모님을 매해 여름방학(5년간)마다 집에 모셔서 기도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매월 첫 목요일에는 루치아 할머니 댁에서 예수성심을 기억하는 성시간으로 밤샘기도를 하였고, 1회 첫 토요일에는 새남터 성당에서 가정 미사를 봉헌하였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백제 기도원으로 철야기도를 다녔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두려움 없이 한 걸음으로 달려갔다. 광명에서 10년간의 직장생활과 기도생활은 모두가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신앙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토양이 되었다.

 

96년 아이들을 키워주신 부규진 마리아 할머니가 5월 성령강림 대축일에 세례를 받고 7(음력 623) 중순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 장례를 치룬 후에 광명 집을 팔게 되었다. 그해 여름은 광명여중 교사로서 이화여대에서 환경 부전공 연수를 받고 있었다. 그날은 환경부전공 연수 마지막 날이어서 그동안 함께 공부했던 선생님 댁에서 종강 파티를 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성모님께서 오늘 이 집이 팔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집이 팔리지 않았는데 종강하는 날이니 그대로 이화여대에 갔다. 종업식에서 영광스럽게 이화여대 총장상을 받았다. 전국 150명 환경부전공 자격 연수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상상이외였기에 나의 이름을 부르는 데도 난 알아듣지 못하였다. 제자와 함께 연수를 받았는데 제자가 나를 툭 치면서 선생님 이름이 불린다고 떠 밀어서 앞으로 나가 상을 받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정릉 선생님 댁으로 가서 식사를 막 하려는 순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우리 집을 사려고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 계약을 해야 하니 얼른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서둘러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부동산에 가서 매매계약을 하는데 놀랍게도 내가 이분이 이집을 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 바로 앞에서 공장을 경영하던 사장님이었다. 영세업자였기에 사업이 그리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이들도 있고 마음씨도 좋아보여서 나도 기분 좋게 현시가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으로 계약을 했다. 34백에 산 집이었는데 10년 후 1억 천 2백에 팔렸으니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2층 전세금을 올릴 때마다 남편 대학원 학비를 댈 수 있었다.

 

다음 문제는 우리가 살 집을 구해야 한다. 그때 평촌에 아파트촌이 10년쯤 되는 시기였다. 큰 딸이 안양고등학교 재학 중이었고 나도 학교를 안양으로 옮기고 싶었다. 아들이나 막내의 교육을 위하여 안양으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남편과 뜻을 모았다. 물론 이사하는 문제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하였다. 96823일 아침에 일어나는데 성모님께서 오늘 네가 집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난 놀라워하며 남편과 함께 계약금을 들고 안양 평촌 단지로 왔다. 당시 평촌에 32평 아파트는 17천 정도가 시세였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돈은 전세금을 빼주고 나면 85백만 원이 전부였다. 우선 방이 세 개이고 화장실이 두 개인 32평 아파트 전세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나는 평촌 일대를 돌아보았지만 마땅한 집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부동산에서 길 건너 저쪽 지금 현대아파트 쪽을 가리키면서 그곳에는 집이 좀 싸기 때문에 평수가 작은 아파트를 대출을 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때 느티나무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곳 부동산에 들렸더니 27평 아파트가 하나 나온 것이 있다면서 5층짜리 아파트 가장 꼭대기 층을 보여주었다. 집을 보려고 찾아갔는데 주인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집을 살 수가 없나보다 하며 광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경수대로 비산 지하차도를 막 건너는데 다시 가슴 속에서 아침에 성모님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오늘 집을 사야하는데 25일부터는 학교가 개학을 하니 기회는 오늘과 내일뿐이다. 갑자기 유턴하여 다시 부동산으로 돌아왔다. 아까 주인이 없어서 계약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주인에게 연락해 보면 안 되겠냐고 말했더니 부동산 주인이 이분이 그 집 주인이라며 소개해 주었다. 난 다짜고짜 집을 계약하겠다고 들이댔다. 주인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내가 계약금 천만 원을 주면서 계약하자니 엉겁결에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그렇게 재건축하기 전 5층짜리 아파트를 일억 천이백만 원을 주고 구입하였다.

 

광명 집이 팔린 것도, 안양에 복음자리를 마련한 것도 성모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971029일 안양으로 이사를 왔다. 10년 동안 정이 들었던 광명 집을 떠나 올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정이 들었던 성당과 대부님, 대모님, 형제자매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그토록 슬펐던 것이다. 큰 딸은 안양고등학교, 아들은 범계중 2학년, 막내는 범계 초 4학년에 전입되었고 난 이곳에서 광명여중으로 출퇴근 하였다. 재건축하기 전 현대 아파트는 평수는 크지 않았지만 조용하고, 조경이 잘 되어서 주변 환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수리산 풍광이 어디에서나 잘 보이고 봄에서 겨울까지 계절마다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는 친환경 주거였다.

 

9731일 안양 신안중학교에 근무를 하게 되면서 안양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수리산, 관악산, 청계산, 모락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안양을 남편은 아주 좋아하였다. 언젠가는 안양 김씨를 새로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성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명학성당에 잠시 다니다가 호평성당이 설립되어 비산동 성당 구 성전에서 미사를 보게 되었다. 이때 남편은 전례부장을 하였고, 최 바오로 신부님이 주임 신부님으로 사목하였다. 호평성당 건축을 위해서도 신자들이 공터부지에서 날마다 묵주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9884일 범계성당이 아파트 정문 앞에 새로 건립된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주 성모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모니카 할머니가 현재 범계 성당 건물을 교구에 헌납하면서 이 지역의 복음화의 터전 범계성당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즈음에 또 현대아파트 재건축이 되면서 우리는 잠시 2년 동안 범계 중학교 앞에 있는 금호아파트에서 살게 되었고, 범계성당 관할구역에서 살았다.

 

현대아파트가 재건축이 완성되어 돌아온 것은 200312월이다. 27평 아파트가 36평 아파트가 된 것이다. 부담금이 4500만 원 정도가 추가되었지만 국민은행에서 대출할 수 있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이곳에 사랑의 보금자리와 신앙생활의 터전 범계성당도 마련해 주셨다.

남편은 평신도 단체회장, 재정부장, 전례부원, 레지오 단원으로, 난 성령쇄신 봉사와 전례부, 성물판매, 울뜨레아 회원으로, 큰 딸과 작은 딸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