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간의 묵상
제2주간 둘째 날 (6.28.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마태 13,1-23
본문 :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8)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2018년 1월 13일부터 21일까지 허규 신부님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특히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였던 갈릴래아와 가파르나움 일대를 둘러보며 오늘의 말씀을 묵상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대부분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며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다. 주님도 목수 일을 하면서 그들과 같은 환경에서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처럼 신앙을 연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유다인이기에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을 다 알고 있다. 유다인들은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는데 이때 통과해야 하는 것이 모세오경을 완벽히 외우는 것이다. 예수님 앞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들은 성경을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율법과 전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들은 하루 일을 마친 후 또는 안식일에 회당이나 호숫가로 모여든다. 성지순례를 다녀오기 전에는 성경의 배경,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나 회당, 호숫가 등이 연상되지 않았다. 순례 후 이스라엘의 지형과 갈릴래아, 예리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주님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오늘의 장면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아직도 갈릴래아의 타브가, 가파르나움 또는 행복선언을 했던 주변에는 마을이 없고 예수님 당시의 마을 모습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2천 년 전에도 오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무대배경 :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다. 갈릴래아 호숫가, 베드로와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던 곳, 베드로 집터가 있는 그 부근이었을 것이다. 군중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왔기 때문에 말씀하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탓을 것이다. 그리고 물가였기에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서 있다. 군중들을 향한 예수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이스라엘의 자연현상을 그대로 이용하여 누구든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쉽게 말씀을 하신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그들의 마음을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비유하고 있다. 갈릴래아 주변에서 이 모든 것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이 다니는 좁은 길, 지금도 갈릴래아 주요 도로는 왕복 2차선이다. 차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그 당신에는 낙타, 소, 양떼,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길 옆에는 야트막한 산들이 있는데 나무들이 거의 없는 돌산이다. 또 가시덤불도 볼 수가 있다. 도로에서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에는 무성한 풀들이 있고, 그 풀들 사이에 가시덤불이 있다. 또 호숫가 주변에 좋은 땅도 물론 있다. 그곳에는 물이 풍부하고 돌도 없이 부드러운 땅으로 된 흙이 있는데 온갖 과일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과 밀, 보리 등 농작물을 가꿀 수 있는 곳이 있다.
주님이 전하는 복음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으로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신다. 우리 마음의 밭은 좋은 땅이어야 한다. 좋은 땅을 가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의 수확을 낸다.
좋은 땅인데 왜 수확량이 다를까? 씨를 뿌리는 사람은 같은 양을 뿌렸다. 그렇지만 좋은 땅도 어떻게 정성을 들여서 가꾸느냐? 에 따라 수확량이 다르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것을 보았다. 같은 환경과 조건과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수확량이 집집마다 다른 것을 보았다. 김을 메주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골라내고, 벌레를 잡아주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는 농부의 땀과 노력에 따라 소출이 다르다. 모든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할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하여 공정하게 말씀의 씨앗을 뿌려주신다. 그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농사를 짓는 이들의 몫이다. 영적인 수확을 풍부하게 거두기 위해서는 말씀을 받아들인 당사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이 서로 만나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느님의 땅에서 영적인 소출을 내는 데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평신도의 사도성에서 그 길을 찾는다.
어제(6월30일)는 하상신학원 총동문회 하계연수가 수원가톨릭대학교 대강당에서 이수완 교수님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2018년 평신도 희년을 맞이하여 희년의 주제인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는 말씀으로 화두를 여셨다.
평신도 희년의 정신운동은 희년의 정신과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신심운동은 북녘형제들의 자유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실천운동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겠습니다.’ 즉 희년의 정신을 반영하는 구체적
실천 운동으로 냉담 교우 회두 권면, 이웃과의 화해, 가난한 사람 돌봄 등으로 펼치고 있다.
희년은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희년은 죄로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영성적 차원을 지닌다.
‘내가 너희를 뽑았다.’ 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참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에서 나온 것으로 교회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포도나무는 교회의 표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교회는 성부 하느님이신 농부가 기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포도나무에 매달린 가지들이다. 이 비유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이란 나무의 가지이며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요청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수고를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도직은 세상으로 복음을 들고 가는 것, 열매를 맺는 것,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개인소명이며 나만의 고유성이다.
평신도들의 임무는 자기의 소명(personal vocation)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자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모든 현세 사물을 조명하고 관리하는 것이며, 모든 일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발전하여 창조주와 구세주께 찬미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교회헌장 31항)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은 주님 안에서 개인소명(고유성)을 찾아서 살아가는 사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터득한 개인 소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또 평신도의 삶으로 성인의 길을 가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자아인식과 사도성을 들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였다.
영성은 삶이며, 소명은 이념이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란 역동적 관계 안에서 개인소명을 찾고 진정으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그 앎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에서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이 세상에 투신하였다.
“그녀가 기도 중에 있는 어느 날 하느님은 그녀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다. ‘딸아 너는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아느냐?’ 만약 네가 ‘너는 아무것도 아닌 자 이지만 나는 있는 자 그이다.’라는 이 두 가지를 안다면 너는 너의 이해로 지복을 얻으리라.”
이수완 교수는 조금은 강한 어조로 우리의 삶에서 개선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행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지적해주셨다.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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