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신학(12주간 묵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9)

기도하는 어머니 2018. 7. 3. 12:24

12주간의 묵상

 

2주간 셋째 날 (7.1.연중 제13주일) : 로마 10, 8-17

 

본문 :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9)

8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로마 10,8)

 

생명의 주님! 말씀이신 예수님은 나의 입과 나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 안에 내 영혼의 내밀한 방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계십니다. 나의 어머니 성모님도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성인성녀와 천사들도 제 마음 깊은 곳에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이제는 숨어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마음을 모아 기도할 수 있고, 사랑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그분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나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일 할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쳐 잠자리에 들 때에도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평안히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까지에는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책이며 나와는 무관한 이스라엘의 역사로 인식될 때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나와 나의 남편, 나의 자녀들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가? 하느님을 나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요술방망이로 오인한 적도 있습니다.

 

세속과 마귀와 재물의 유혹 앞에서 늘 흔들리고 넘어졌습니다. 믿음생활을 하지 않는 자들이 더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때로 그들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사회적 불평등 제도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세상에서 보이는 부와 명예와 권력과 학벌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는 나에게는 고통과 시련이 끝이 없는가?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이라고 하는데한때는 무자비하고 침묵하시는 분으로 오해를 한 적도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한심하고 어이없고 어리석은 벌레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고통은 은총의 전주곡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완전히 죽어야 완전히 살 수 있다는 세상의 논리와 반대되는 모순을 받아들이기까지 수없는 패배와 좌절과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고통 앞에서 좌절할 때 나와 함께 울고 계셨고, 신음하며 아파할 때 애처로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집나간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눈마저 흐려졌습니다.

 

나의 마음과 나의 입술에 현존하시는 너무나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저잣거리를 수없이 쏘아 다녔습니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 찾아 다녔습니다.

서른세 살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양파껍질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교만, 이기심, 분노, 미움, 탐욕과 음란, 시기와 질투, 거짓과 오만, 고집과 편견은 찰거머리처럼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벌레와 같은 나를 구원하고자 인내로 기다려주시고 끝없이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고 오점을 드러내는데 주님은 나의 선행 하나에도 감동하시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단점은 덮어주시고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어 주셨습니다.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보살펴주시고,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결국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할 매를 죽도록 맞으시고, 내가 써야할 가시관을 당신의 머리에 쓰시고, 내가 받아야 할 조롱과 핍박을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발길질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셨습니다. 나를 위한 희생제물과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드디어 주님 십자가 아래에서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무뢰한 죄악 덩어리를 보았습니다. 주님의 성혈이 죄인의 마음과 영혼 위로 쏟아져 내릴 때 내 안에 있던 죄악들이 그 모든 악취가 씻겨 나갔습니다. 십자가 위에 잠든 당신의 옆구리에서 제가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의 성소는 골고다 언덕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부활하시고 내가 죽어야 할 차례입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성심을 만났습니다. 성모님의 애끓는 성심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절절한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모든 이들을 만났습니다.

 

! 나를 위한 하느님의 십자가는 또 다른 너를 위하여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저도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사랑,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실천 불가능한 것을 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 23)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인간 본성이 창조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참된 회복을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주님 이 세상 사람들이 마음의 귀와 영의 눈이 열려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으면 합니다. 자신을 위해 처절하게 죽어가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으로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침묵, 자유, 용서, 진리입니다. 본성에 따른 행위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 뺨을, 오리를 가자는 이에게 십리를 함께 가 줄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심판하지 않으며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내가 남에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