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남이 (76)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84-13 T 063-214-5004)
2016년 3월 7일 사순 제4주일 월요일
숲정이 성지에서 초남이를 검색하였다. 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초남이 성지는 유항검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내려와 가족들과 가속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김제, 금구, 고창, 영광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신부로도 활동했지만, 가성직제의 부당함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만 둘 것을 요청했다. 그 후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함께 했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가 이곳에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고 유항검과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했다. 유항검은 신유박해(1801) 때 체포되었고 ‘대박청래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대역부도죄를 선고받아 그해 9월 17일 풍남문 밖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순교하거나 유배되었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되었다. 또 이곳은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부부의 삶을 4년 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유항검의 가족들 중 7명이 신유박해 때 순교했는데 이들의 시신은 처음에 바우배기에 모셨다가 1914년 치명자산으로 이장했다.
파가저택(破家瀦宅) 중죄인의 집을 헐어 버리고 물을 대어 못을 만들던 형벌.
초남이는 해가 잘 드는 양지바른 곳으로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넓은 평야가 있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중철 요한이 살았던 생가터여서 그런지 아주 정감이 갔다. 파가저택으로 집을 헐어버리고 그 곳에 물을 대어 연못을 만들었다. 대역죄의 참혹함을 알 수가 있었다. 집을 이렇게 헐어버릴 때에 사람에 대한 문초는 어찌 하였을까? 호남의 사도로 호남 전 지역을 전교하였던 성인이 위대하고 거룩함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가족들과 가속들에게 전교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형제라고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정말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같은 신앙을 할 수 없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나와 둘도 없이 지내는 여동생이 이 귀한 신앙을 함께 갖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이 불러주지 않는 것인가? 나의 정성과 사랑이 부족한 것인가? 아마 후자일 것이라 생각하며 더욱 노력하고 있다. 성체조배실에 들려서 한참 묵상을 하고 기도를 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시여!! 제 집안을 위하여, 부모형제자매들의 구원을 위하여 전구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