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 순교성지 (61)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51 T 041-363-7200)
2016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목요일
홍주 순교성지에서 신리 순교 성지를 검색해서 달렸다. 한 시간 거리였고 올라가는 길이어서 신리와 신평 원머리 성지를 들리면 오늘의 순례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역시 콧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신리에 도착하여 성지를 둘러보니 이곳이 이렇게 크고 멋진 성지가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안타까왔다. 대전교구하면 솔뫼, 해미, 갈매못 만을 생각해서 그런가보다. 성지 중간에 새를 든 키가 큰 성인의 모습이 아주 독특했다.
조선의 카타콤바 순교자들의 고향, 순교자들의 안식처인 신리 순교 성지는 박해기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다. 병인박해 이전까지 약 4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가 천주교 신자였다. 교우들은 당시 주교를 비롯하여 선교사제들의 활동에 결정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신리가 내포지역 포교의 거점역할을 하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1865년 위앵 민 신부, 도리 김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등 세 명의 선교사제가 이곳으로 무사히 입국하였다. 신리는 조선 제5대 교구장 성 바블뤼 안토니오 주교(1818-1866, 갈매못 순교)의 비밀 거처였다. 성지 내의 초가는 성 다블뤼 주교관이자 비밀 성당이기도 했다. 주교는 이곳에서 성 확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한글 교리서와 신심서 등 천주교 서적을 저술 하거나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 ․ 기록하여 파리로 보냈다. 이 자료들은 훗날 <한국천주교회사> <달레, 1874>의 토대가 되었고 한국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현재 시복 심사 중인 ‘하느님의 종 124위’도 이 자료의 결정적인 증언에 의지하고 있다. 주교관은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터이다. 자신의 살을 입으로 물어뜯어내면서까지 천주 사랑의 증거를 보였던 성인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1866년에 순교 하였다. 그리고 고향 신리에 묻혔다. 병인박해로 주인을 잃은 이 집은 1927년 교우들의 정성으로 다시 매입하여 현재에 이른다. 문헌에 기록된 신리 - 거더리 출신 순교자만도 4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성지 인근에 32기의 머리 없이 발견된 무명 순교자의 묘와 손자선의 가족 순교자 묘 14기 등 40여 기의 순교자 묘가 있다.
성당 내부와 주교관, 야외제대와 광장에 있는 성인 경당을 둘러보고 전시관에 들어가서 수녀님의 안내를 받으며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누군가 멀리서 “마리아씨!” 하고 부른다. 혹시 다락골 성지에서 만났던 모니카 언니가 아닐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더니 역시 모니카 언니였다. 성지에서 여러 번 만나다보니 자연스럽게 “언니!” 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서로 반가 와서 악수를 하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갈뫼 성지를 갔는데 수녀님이 성지에 대한 안내를 해주면서 꼭 신리를 들려야 한다고 해서 곧장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난 청양에서 홍주를 들려 신리로 왔고, 모니카 부부는 갈뫼를 들려 이곳에서 서로 만난 것이다. 두 번째의 만남이 반가워 오늘 저녁 집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물면서 내일까지 순례를 마저 하고 가자는데 공감을 하였다. 준비도 전혀 없이 어떻게 숙박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용기를 내었다. 순교자들은 깊은 숲속 길을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걸었을 것을 생각하니 하루쯤 제대로 씻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신리성지를 다 둘러 본 후 근처에 있는 여사울, 배나드리, 남방재를 더 순례하기로 하였다. 요왕 형제님이 앞장서고 나는 뒤따라가기로 하였다. 주 성모님이 이끄신다고 생각하니 그대로 순명하고 싶었다. 그래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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