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성지순례

묘재성지(49)

기도하는 어머니 2016. 2. 22. 12:30

묘재 성지 (49)

(충복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326-1 T 043-651-4527)

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배론 성지에서 점심을 먹고 묘재로 출발하였다. 8분 정도 가니 묘재가 나타났다. 묘재는 배론 성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순례스템프는 고즈넉한 한옥 툇마루에 놓여 있고, 신자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기도방도 마련되어 있다.

묘재 성지는 남종삼 요한 성인의 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한 곳으로 남종삼 성인이 살던 곳이다. 남종삼 성인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학문과 사상, 그리고 천주교 입교 등에서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래 생부는 남원교이나 종숙부인 남상교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갔다.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서구 열강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는 상소문을 올렸고, 대원군은 남종삼의 상소문을 받아들였으나 주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에 상황이 바뀌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남종삼은 묘재에 피신하다가 붙잡혀 순교하였다. 남상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아들 남종삼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뒤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1920년대부터 이 마을에 신자들이 들어와 살면서 교우촌을 이루었고, 1938년에 목조 건물의 공소를 신축하였다. 유택 앞에 있는 옛 공소 건물는 1955년 9월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학산 공소는 1989년에 신축하였다.

남종삼 성인이 사셨던 유택은 양지바르고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이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밭이 있어서 아늑하면서도 따뜻하였다. 높은 벼슬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받아들이고 치명한 성인의 정신을 본받아 죽기까지 천주교를 믿고 따르고 전파하리라 결심해본다.

남상교 아우구스티노와 남종삼 요한에 대한 순교 내용을 인터넷 자료를 조사하여 추가하면

병인년 순교자 남상교(南尙敎)님과 아들 성 남종삼(南鍾三)님 이야기

-의령 남씨 중에서도 명문가인 팔각정(八閣亭 )남씨(팔각정 남씨라 함은 남종삼의 7대조인 선의 후손 가문에서 8명의 판서를 배출하였다 하여 그 가계에 붙인 칭호)가문의 후예인 남종삼 집안이 천주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그의 양부인 남상교(南尙敎)의 천주교 입교에 의해서였다.

-성 남종삼(南鍾三)은 본디 남상교의 종제인 남탄교(南坦敎)의 아들이었다.

그는 딸만을 둔 큰댁 상교 공의 뒤를 잇고자 어린 시절 상교의 양자로 입적하여 장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상교는 정조8년, 즉 한국 천주교회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창설되는 1784년에, 통덕랑 남이우를 부친으로, 정랑 이기풍의 딸인 광주 이씨를 어머니로 하여 지금의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재답게 천성이 어질고 재질이 총명하였던 남상교는 이미 여덟 살 때에 고을의 백일장에 나가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

-순조 때에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서 대구 현풍 현감과 경북 영덕의 영해부사 등 지방 원님의 일을 맡아 보다가, 헌종 때 충주 목사가 되어 고향땅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돈령부 동지사의 일을 맡아보았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하느님이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임을 가르치며 인간이 의롭게 살아야 하는 까닭을 선명히 가르치고 있는 천주교를 보다 뛰어난 가르침으로 깨달아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유교적 양반의 전통이 특히 뿌리 깊은 충청도의 유서 깊은 옛 고을인 충주는 세인의 이목이 많고 유풍(儒風)이 거센 곳이어서 천주 신앙을 실천함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새로이 들어선 참 신앙의 생활을 위해 남상교는 관직의 뜻을 버리고(높은 관직도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고사한 일이 많음)충주 고을을 떠나 은거 하면서 오직 신앙생활에만 몰두하고자 결심하였다.

이러한 결심을 굳힌 남상교는 충주에서 산 깊고 물 맑은 제천 땅의 산골 마을인 묘재(山尺: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묘재에서 생을 다할 생각으로 입주한 이유 중 하나는 묘재에서 10리 남짓한 거리인 배론 마을에 박해 시대에 세운 ‘성 요셉 신학교(1855~1866)’가 있었고, 그 신학교에 푸르티에(Pourthie, 申)신부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신부 두 성직자가 있어 그의 영신 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83세의 늙으신 몸으로 옥중에서 장손(명희), 자부(子婦), 즉 남종삼의 부인과 나머지 세 손자, 즉 남종삼의 장녀, 차녀, 그리고 차남도 체포되어 창녕으로 종살이하러 귀양살이 보내졌다는 소식, 이 소식을 들은 남상교의 가슴은 쓰라리기 말할 데 없는 것이었으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르기로 한 그의 신앙은 동요치 않았다.

-소식을 접하고 놀란 것은 선생의 높은 학문을 흠모해 오던 제천(堤川)의 유생 들이었다. 그들 유생들은 제천 현감 유남규에게 그를 석방하도록 간청하는 한편 압력을 가하였다.

유남규는 유생들에게 '글로라도 좋고 구두라도 좋으니, 여하튼 배교한다는 말만 받아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님은, 늙은 나이에 옥고로 건강이 몹시 쇄약해진 가운데서도 배교의 권고에 끝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음력으로 삼짇날인 4월17일, 마침내 남상교는 옥중에서 조용히 숨져 옥사 치명하여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 남종삼(南鍾三) 1817(순조 17)~1866(고종 3).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1866년 천주교박해 때 순교했다. 본관은 의령.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중재(重齋). 세례명은 요한. 아버지는 탄교(坦敎)이다. 어려서 큰아버지인 상교(相敎)에게 입양되었다. 남인계 농학자로 충주부사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공부했고, 1838년(헌종 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철종 때 승지가 되었다. 고종초에는 왕족자제의 교육을 담당해 흥선대원군과 친교를 가질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동전한문서학서 東傳漢文西學書〉를 읽으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한때는 베르뇌(Berneux) 주교를 숨겨주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철종말 러시아의 통상요구로 나라 안에 위기감이 감돌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주교를 공인받기 위해, 영·프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고자 하는 방아책(防俄策)을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방아책에 관심을 가졌던 대원군이 주교 베르뇌·다블뤼(Daveluy)와의 면담이 지연되는 동안 태도를 바꾼데다가, 북경에서 천주교박해가 일어났다는 오보(誤報)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1866년 천주교는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도 체포되어 순교(참수)하였다. 1968년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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