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버지의 영면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곳으로 돌아 가셨다.
하느님의 영혼과 숨결을 입고 이 세상에서 78년 동안 살다가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아버지는 부인 둘에서 8남매, 3남 5녀를 낳았다. 며느리 둘, 사위가 다섯, 혼인을 하지 않는 막내, 18명의 손자를 포함하여 직계 33명이 아버지의 영면하심을 지켜보았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삶을 업으로 하셨지만, 손재주가 있어서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는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3대 독자로 살면서 외롭고 힘든 여생이었지만 말이 없으시고 남에게 해가 되는 언행과 일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즐겼던 도박(화투놀이) 때문에 첫 결혼에 실패를 하였지만(첫 부인과의 이혼 내가 여섯 살 때) 나이가 들면서 그것마저도 접으셨다. 말년에는 게이트볼에 취미를 붙여서 시간이 날 때는 게이트볼을 즐기셨다. 구좌 노인 대표로 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농한기에 시간이 나면 노인정에 가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오래전부터 형제들이 함께 모여 즐겁고 화목하게 지냈다. 형우회를 조직하여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며 아버지를 주축으로 하나가 되는 행복한 삶을 살아 왔다. 손자손녀들, 며느리, 사위, 아들 딸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아무도 예측하지 않았기에 가족 모두가 아버지의 죽음을 아파하고 있다. 2010년 여름 방광암의 진단을 받고 제주대학 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결과가 좋다고 하여 거의 1년은 아무런 걱정 없이 지냈다. 11년 5월 10일 지훈이 결혼 때도 가족들과 함께 안양에 오셨고 예식에도 참석하였다. 건강관리를 잘 하면 방광암은 노인성 질병이기에 오랫동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1년 추석에 질병이 악화되면서 병원에 재입원하게 되었고 11월 23일에는 삼성서울병원에 올라와서 입원하여 상태를 점검하였다. 검사 결과 상황이 호전될 방법이 의학적으로는 없다고 하여 제주에 내려가셨다. 제주에 가신 후로 제주대학 병원에 다니면서 요양을 하던 중이었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투병을 잘 하셨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 자녀들의 관심과 사랑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큰 위로가 되었다. 지난 4월 21일 제주에 갔을 때 아버지가 위급한 상황을 넘겼고 그 후에도 몇 차례 혼수상태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이 처한 운명을 받아들이시고 더 이상 여한이 없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은 행복하였다고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감사하다는 표현과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고, 자신의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는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을 정리하셨다.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파티마성모발현축일
지난주일 이 시간 만 해도 아버지께서는 일주일 이상을 더 살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났었다. 5월 13일 아침에 잠에서 깨어 새벽 기도를 하는데 오늘 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성모님께서 마중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일 년 중 제일 좋아하는 파티마 성모님 발현 축일이기 때문이다. 난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남다르다. 개신교를 다니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을 때(1988년)는 파티마 성모님이 성당별로 순례를 하면서 신자들 가정에서 2박 3일씩 모셔서 기도하곤 했었다. 신앙이 부족한 나는 여름 방학 때마다 파티마 성모님을 모시고 기도를 드렸었다. 5년 동안 계속 기도를 하면서 가정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남편, 시어머님, 시동생, 시누이, 친정동생 정순이까지 새롭게 입교를 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아이들도 영세를 받아서 신앙 안에서 잘 성장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월 13일이 되면 주님과 성모님을 기억하며 기도에 정진하곤 한다. 특히 5월 13일은 성모님께서 포르투칼 이리아 골짜기에서 양치는 세 목동들에게 첫 발현하신 날이다. 아침 기도 중에 히아친따, 루치아, 프란치스코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며 성모님께 더욱 의탁하였고 임종하는 이들의 수호자이신 요셉성인, 오상의 비오신부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김수환 추기경님 등 부탁드릴 수 있는 성인들에게 모두 전구를 청하였다. 한국의 103위성인, 124위 시복 시성 중에 있는 성인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기도드리며 아버지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남편 바오로가 금요일(11일) 제주에 내려갔다가 토요일(12일)에 왔는데 상황이 안 좋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오늘처럼 좋은 날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주일 미사를 드렸고 3시에 다시 성당으로 가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였다. 저녁에 집에 왔는데 어쩐지 불안하고 안절부절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동생 호철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의사가 와서 보더니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일주일은 간다며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은 아니구나 하면서 마음을 놓고 또 다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호철이가 전화 와서 저녁 8시 49분에 아버지가 종명하였다고 한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멍하게 앉아 있는데 남편이 침착하게 내일 아침 새벽 비행기로 내려가라면서 비행기표를 예매를 해 주었다. 마지막 종명하는 순간을 뵐 수 없었던 것이 마음 아프다. 여러 차례 제주에 내려가서 나날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뵙기는 했어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불효처럼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마음을 가다듬고 월요일 아침에 제주에 내려갈 생각을 하며 이것저것을 챙겼다. 아래층에 사는 안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모니카에게 연락하여 달려왔다. 이것저것 성당 일들을 정리하고 연도를 바쳤다. 아무튼 오늘처럼 좋은 날에 돌아가신 것은 아버지의 복이라며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5월 14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아침 8시 15분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비행기 안에서도 아버지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바라며 묵주기도, 자비심을 비는 기도, 성인호칭기도 등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기도를 하였다.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메시지를 점검하는데 정선이가 공항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른 택시에서 내려 정선이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어제 저녁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운명을 하셨는데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곱고 평안했다고 한다. 종명한 후에도 손자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할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려서 장례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함덕 그린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다. 아버지가 돼지띠인데 오늘이 돼지날이어서 성복도 할 수 없고 시체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상주들이 상복도 입지 않고 손님들이 오셔도 절도 한 번 밖에 할 수 없다고 한다. 난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울었다. 손님들이 간간이 찾아와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상주들을 위로하였다. 하루 종일 조문한 숫자가 450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저녁에는 영정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상장 예식서를 보면서 혼자서 기도하였다. 함께 할 동지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정순이도 가톨릭 신자인데 작년에 냉담을 풀면서 가톨릭 전례에 익숙해져 있지가 않다. 남편이 함께 해주었으면 했는데 그것도 어색했다. 그래서 혼자서 임종경부터 시작하여 운명, 위령기도, 염습, 입관, 출관, 장례미사, 운구, 하관, 초우, 재우, 삼우, 면례에 이르기까지 한 번 읽어보지도 않은 예식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며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아버지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저녁 10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새벽 3시 30분까지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또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졸리지도 않고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 시간이 내게는 많은 위로가 되었고 아버지의 영혼에게도 축복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되었다.
5월 15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스승의 날(교사가 된 지 34년이 되는 날)
아침 5시부터 염습을 하였다. 아버지의 모습은 평온하고 고우셨다. 틀니를 하고 있어서 틀니를 뽑았기에 입술 있는 부분이 훵하였지만 이마, 코, 얼굴, 머리 모양 등 평소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장례사가 아버지를 깨끗이 닦고 마지막 염을 하기 전에 자식들에게 인사하는 시간을 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팔, 다리, 얼굴 모습을 어루만지며 아버지의 채취를 간직하려고 하였다. 끊임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젊고 튼튼하고 힘이 넘치던 팔과 다리, 어깨와 등짝은 다 어디에서 녹아버렸는지 뼈와 가죽만 남아 마른 나무처럼 말라버린 아버지의 시체를 보면서 마음이 저리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 시간 정도에 걸친 수세와 염을 마치고 영정 있는 곳으로 와서 상주 복을 갈아입고 성복제를 지냈다. 형제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나자 손님들이 문상하기 시작하였다. 쉬지 않고 찾아오는 문상객들로 장례식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8남매에 며느리, 사위까지 합하면 상주가 15명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1,50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장례식장이 생긴 이래 이처럼 많은 인파는 처음이라고 한다. 조화만 88개가 들어왔으니 말이다. 정자내외, 정순내외, 호철 내외 등 손님이 제일 많았다. 난 서울에서 32년 이상을 살았으니 아주 가까운 시댁 친척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사돈어른 내외, 원정이 내외와 지원이, 지훈이 내외와 학교 선생님 6명 학교에서 2명 정도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섯 명이나 와서 깜짝 놀랐다. 서재덕샘, 이상은샘, 정경임샘, 안혜신샘, 윤효진샘, 김인숙샘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까지 오신 것이다. 정말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동안 함께 했던 우정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그 외에 고향에서 소식 전하며 지내던 동창들 임교장, 김교수, 문세관장, 김간호사 등이 왔고 고향친구 미숙이가 와 주었다. 이리저리해도 나의 손님은 한 50-6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시어머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주었고 큰 시누이와 작은 시누이가 늘 곁에서 도와주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오후 6시쯤에 일포제를 지냈고 일포제를 지낸 후에도 9시 넘게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고 왔다. 나의 마지막 손님은 제주 중앙여고에 근무하는 김명희 세실리아 수석님이었다. 고향이 제주였기에 수석교사 활동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고 댁이 조천 성당 옆에 있어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다면서 찾아와 주었다. 손님들과 친인척들이 다 돌아가고 난 후 저녁 늦게 장례비용을 계산하여 결산하는 시간이 되었다. 형제들이 다투지 않고 의논하는 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자와 정순이는 손님들이 많았기에 조금 더 부담하고 정복이와 정선이도 같은 비율로 부담하였다. 난 손님이 제일 적었다면서 가장 적게 부담을 시켰다. 막내 승철이에게는 공동 부담 외에는 부담을 주지 않았고, 나머지는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이 알아서 부담을 하였다. 우리 형제들이 우애 있게 지냈던 것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도 화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5월 16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5.16 혁명일
아침에 출관제를 지내고 운구를 동관하여 운구차에 아버지를 모셨다. 동관을 할 때에는 부산에서 온 재원, 지훈, 경탁, 경민, 상돈, 상범이가 함께 하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가족 공동묘지로 향하는데 구름 속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하는 성체 모양의 태양은 아버지의 천국행을 약속이나 하듯이 운구차를 뒤따라 왔다. 그린 장례식장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해안동 선영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내려놓고 묘지가 정리될 때까지 자녀들이 곡을 하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난 그동안 하루에 한번 씩 전화를 하며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생각나서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파이팅 힘내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사랑합니다.
그래 힘내겠다.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 보겠다. 용기를 내겠다. 사랑한다.
아버지 식사하셨어요? 그래 밥 먹었다. 조금씩 걸어 다니시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그래 오늘도 조금씩 걷는데 아주 힘이 들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아버지 나 착한 딸이었어요? 그래 너는 착한 딸이다. 아버지 내 마음 아시지요?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 네 손에서는 이상한 힘이 나온다.”
마음 졸이며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젠 그나마 아버지의 음성조차 들을 수 없으니 마음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다. 날씨는 시원하고 바람도 없이 아주 쾌청하였다. 울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오월의 날씨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지 날씨마저 아버지의 안식을 빌어주는 듯하다. 경주이씨 상서공파 공동묘지는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친척 오빠들이 얼마나 정확하고 깔끔한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묘지가 정리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이규삼, 정씨 할머니, 김재봉 할머니와 일가친척들의 묘지도 참배하며 절을 올리기도 하였다. 하관예절이 끝나고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졸곡제를 지내고 모든 장례절차를 다 마쳤다. 끝까지 돌봐주시는 어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아무리 형제가 많다하여도 어찌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 계명 못지않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휴식을 조금 취한 뒤에 저녁에는 친정집 아버지가 머물던 방에서 귀향풀이와 질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제주에서는 장례를 치루고 난 후 형편이 허락하면 토속신앙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생전에 가족들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로 위로를 하며 원한 없이 영혼이 영원한 안식에 들도록 하는 행사를 한다. 난 신앙이 다르기에 축원하는 이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거나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절차들을 눈여겨보면서 인간의 나약함과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모두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일들이 떠올라서 또다시 눈물이 비가 되어 흘렀다. 아버지께서는 형제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 어머니를 잘 모시는 것, 막내 승철이가 결혼할 때 힘을 모아 도와줘야하는 것 등등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무녀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시집와서 모진 고생을 다하였지만 위로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하나 밖에 없는 누님 (허신생 고모)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 등등 이를 난 미신이라기보다 상처치유라고 보았고 이렇게 해서라도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밤늦게 모든 행사를 마치고 시댁에 가서 시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5월 17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아침에 시댁에서 일어나 친정에 갔더니 이미 아버지의 영정을 명법사 절에다 모시고 모두 집으로 돌아 갔다고 한다. 나는 상돈이네 가서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예약하였다. 이스타 항공 12시 40분 비행기여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얼른 아침을 챙겨 먹고 택시를 불러서 비행장까지 타고 왔다. 친정어머님이 많이 피곤하여서 영양제를 맞아야 한다고 구좌 의원까지 모셔다 드리고 제주 공항으로 향하는데 난 택시 안에서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였다. 공항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12시 40분 이스타 항공을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도착하자 남편이 구두가 엉망이라며 구두를 수선해서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구두를 수선하는 동안 커피를 마시려고 지갑을 꺼내서 동전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남편이 잔돈 여기 있으니 커피를 뽑으라고 했다. 그 사이에 지갑을 자판기 위에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커피를 뽑고 벤치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구두 수선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안양에 다 도착하자 버스비를 내려고 지갑을 찾았는데 지갑이 없는 것이다. 정신이 멍했다. 우선 택시를 타고 집에 와서 모든 카드를 정지시켰다. 그런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가용을 타고 비행장으로 갔다. 꼭 그 자리에 지갑이 놓여 있을 것 같은 착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책 읽어 주는 라디오 EBS 방송에서 톨스토이의 원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 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 사람의 내면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2.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은 한 가지는 무엇인가?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답변이 명쾌하여 주의 깊게 들었다.
사람의 내면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은 한 가지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이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 대한 답은 사람은 하느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오늘 지갑을 잃어 버린 것, 공항에 가면 꼭 지갑이 있을 것이란 생각, 아버지가 일주일 이상 더 살 수 있다는 것, 의사의 진단과는 관계없이 즉시 돌아가신 것, 장례식이 그처럼 성황리에 치루어질 것이라는 것 등 어느 것 하나 내가 예측했던 것은 없었다. 공항에 가서 쓰레기통과 구두 수선점 주변, 분실물 보관소등을 다 찾아보았으나 지갑은 없었다. 마음이 허망하기는 하였지만 마음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편안히 쉬고 잠을 잤다.
5월 18일 부활제6주간 금요일 5.18 광주민주화 운동
아침에는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버지를 위한 연미사가 10시에 봉헌되어 있어서 성당에 갔다. 미사 후에는 앞으로 100일 간의 미사를 봉헌하려고 우선 30일 간의 미사를 예약하고 돌아왔다. 지원이도 와 있어서 함께 점심 겸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남편과 함께 은행 업무를 보고 지갑을 사려고 자동차를 타고 롯데 백화점으로 가는데 카드사에서 전화가 왔다. 지갑을 잃어버린 것 아니냐고 지금 공항 분실물 센터에 가면 지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묘한 시간에 전화가 온 것이다. 너무나 기뻐서 은행 업무를 마친 뒤 남편과 함께 공항으로 갔다. 분실물 보관소에 갔더니 지갑이 있었고 속에 있었던 각종 카드, 신분증, 현금 등이 모두 그대로 있었다. 모든 것이 놀라운 기적이었고 신비 자체였다. 기쁨과 행복과 평화가 다시 찾아 온 느낌이다. 오후에는 휴식을 취한 후 수원교구 밤샘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교구 성모의 밤 행사와 말씀이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고 계신다. 어떤 상황에서건 서두르거나 당황하거나 슬퍼하거나 포기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섭리에 맡기고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며칠간의 사건과 행사와 일들에 대하여 다시금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우리를 보이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켜주셨던 이재화 아우구스티노 아버지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울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멘
'영성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성심성월을 맞이하며 (0) | 2012.06.01 |
---|---|
수원교구 성령대피정(천진암) (0) | 2012.05.29 |
아버지를 위한 눈물의 기도 (0) | 2012.04.28 |
하느님 자비 축일!!(성인이 되어라) (0) | 2012.04.15 |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는 성령 (0) | 2012.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