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성모님과 함께 써 내려간 가족 구원 이야기

기도하는 어머니 2020. 10. 4. 19:57

성모님과 함께 써 내려간 가족 구원 이야기

 

천주교 수원교구 범계성당 이정숙 마리아

 

20816일 가톨릭 평화신문 제1면에서 가정 선교 체험 수기 공모에 눈길이 갔다. 내용을 확인하고 그냥 스쳤는데 다음날 미사에서 지나온 반세기의 신앙생활이 영화 필름처럼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순간 예레미야 209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라는 말씀이 떠오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써 내려갔다.

 

오늘 당장 마음을 바꿔라

87729일 아침 5시 새벽 기도를 하려고 집을 나섰다. 여덟 살 큰 딸이 지난 밤 엄마와 아빠의 다툼을 엿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나의 손을 꼭 붙잡는다. 두 살 막내의 아픔 때문에 시작한 100일 기도가 중반을 달리고 있었다. 교회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불심 깊은 남편은 제사 문제를 들고 일어났다. 개신교회를 다니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데 장남으로서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합의 이혼을 제안한 거다. 불같은 성격의 남편이 협박을 가할 때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이가 셋이고 시할머니와 시동생 둘과 시누이까지 식구가 아홉인데 이혼은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천주교로 개종한다면 나도 천주교로 개종할 것이니 잘 생각해.”

 

새벽기도회에서 호세아 11장의 말씀이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분명 하느님의 음성이다. “나는 네가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오늘 당장 마음을 바꿔라.” 하는 말씀이 끊임없이 가슴을 방망이질하였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란 무엇일까? 개신교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였기에 개종은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갑자기 딸아이가 큰 소리로 엄마 성당에 가. 성당에 가도 예수님과 하느님이 계시다고 했잖아요.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면 난 죽어 버릴 거야!”라고 소리쳤다. 갑작스런 아이의 울부짖음이 황당했지만 그건 분명 천사의 음성이었다. 그 순간 부모님의 이혼으로 여섯 살 어린 내가 겪어야 했던 아픔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을 바꾸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를 달래면서 그래 오늘 우리 성당에 한 번 가볼까?” 하며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이웃 자매님을 찾아가 성당 가는 길을 알려 달라고 했다. 오늘 아침 새벽 기도에 다녀오지 않았느냐며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자매님은 우리를 성당에 데려다 주었다. 성당에 도착하자 저녁 미사가 시작되었고 어찌된 일인지 미사 경문 한 구절 한 구절이 또렷이 들려왔다. 그날 신부님의 강론도 마음을 움직였다. 성찬의 전례에서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부분에서 그래, 하느님을 믿고 앞으로 한 달만 빠짐없이 성당에 다녀보자.’ 하고 결심하였다. 다음날부터 어린 막내는 들쳐 엎고,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은 양쪽 손에 붙잡고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예비자 교리가 시작되자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리 기도를 하려 해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거다. 사방은 고요한데 낮고 부드럽게 마리아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죽여 귀를 기울이니, 다시 마리아야!” 하신다. 순간 두려운 생각에 머리를 땅에 묻고 웅크렸다. 다시 한 번, “마리아야!” 하고 부르자, 문득 사무엘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대목이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누구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소리가 울려왔다. “너를 낳아 준 네 어머니를 용서하여라.” 나는 두렵고 떨리는 음성으로 안 됩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고 외쳤다. ‘아시잖아요. 제가 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였는지?’ 그때까지도 여섯 살 된 나와 세 살짜리 여동생을 두고 이혼한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무친 그리움은 세월에 휩쓸려 분노와 미움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네 어머니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나의 어머니 마리아를 너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다. 그날부터 낳아 준 어머니를 용서하기 위하여 백일 간 아침 금식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매일 펑펑 울면서 지나온 모든 삶을 주님께 낱낱이 털어놓았다. 결국은 어린 두 딸을 두고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다.

백일기도를 마치자 이번에는 너를 길러 준 어머니를 용서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새어머니에 대하여는 사실 신경도 안 쓰고 살아왔다. 주님 뜻에 따라 새어머니를 용서하기 위해 사십 일 동안 다시 눈물의 기도를 하였다. 마침내 여섯 살부터 나를 길러 대학 교육까지 시키고 결혼하여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신 어머니의 수고와 정성이 보이면서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할 고마운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십일 기도를 마치자 너의 시어머님도 용서하여라.” 하시는 거다. 차갑고 말씀이 없으신 시어머님은 며느리에게는 관심이 없고 아들만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기도하는 중에 서른여섯에 과부가 되어 다섯 남매를 혼자 몸으로 키워낸 어머님의 노고가 눈물겨웠고 가엾은 마음이 들면서 집안을 지탱해 준 훌륭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세 어머니를 용서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나의 어머니로 주셨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던 고질병들이 사라졌고, 마음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었으며 아이들의 잔병치레도 없어졌다. 예수님은 항상 어머니에게 가서 배워라.” 하고 말씀하셨고, 성모님은 내 영혼의 누더기를 깨끗하게 빨아 입히고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이르셨다. 성모님은 나와 우리 가정의 어머니와 모후로써 극진한 사랑을 주셨고 모든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셨다.

 

온 가족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다

8개월의 교리 공부를 마치고 8842일 부활절에 주님께서 불러 주신 마리아란 사랑스런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세례식 때 받아 모신 성체는 사랑의 씨앗이 되어, 하루 속히 남편과도 영적인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으로 커져갔다. ‘주님, 저는 단 한 번의 영성체로 만족합니다. 앞으로 백일 동안 남편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라며 남편 구원을 위해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를 드렸다. 889월 순교자 성월에 미리내 성지를 순례하게 되었는데 비신자인 남편이 동행하였다. 그날 남편의 수많은 질문에 다정하게 답을 해주신 신부님 덕에 남편도 881015일에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이들도 88년 성탄절에 데레사, 요한, 글라라라는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주일에는 다함께 성당에 나갔고,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드리는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난 목마른 사슴처럼 끊임없이 주님을 찾았다. 가톨릭교회 안의 무수한 보화들, 성모님의 전구, 성인들의 통공, 죽은 이를 위한 위령기도, 특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천주교의 매력에 빠졌다. 또한 각종 신심활동은 영성생활을 심화시키고 성장시켰다. 남편과 함께 매일 묵주기도를 하고 말씀을 나누다 보니 결혼 7년 동안 치열했던 종교전쟁은 끝이 났고, 거친 말로 주고받았던 마음의 상처들도 아물면서 주님이 이루신 성가정에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넘쳐났다.

 

불교신자인 어머님의 개종에 이어 시누와 시동생까지 세례를 받다

1993년 여름 시어머님 회갑잔치를 차려드렸던 날 밤에 어머님은 토사곽란을 일으켰다. 밤새 주무시지도 못하고 아랫배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어머님을 여의도 성모 병원 응급실로 모셨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여 급한 불은 껐지만, 의사는 대장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암일지도 모르니 병실로 옮겨 검사를 하자고 했다. 다섯 남매는 너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고, 의사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머님을 살려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고, 마침 방학 중이라 어머님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형제들도 가슴을 졸이며 암이 아니기를 바랐다. 결과는 급성 장꼬임,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듣고 나서야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고, 어머님께서도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고백하셨다. 퇴원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려 옷과 신발과 안경을 사드리고 치과 진료까지 마쳤다.

 

그런데 다음날 김포공항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어멈아, 내가 너에게 은혜를 갚고 싶구나. 내가 성당을 다니면 네가 아주 좋아할 것 같으니, 이번에 제주에 내려가면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아야겠다.” 예순이 넘도록 부처님을 믿어 온 분이 천주교로 개종하시겠다니 놀랄 일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약속대로 제주에 내려가 교리공부를 마친 후 데레사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지금까지도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9794세의 시할머님도 성령강림대축일에 마리아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해 8월에 선종하였다. 신앙생활 10여 년에 4대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유치원을 경영하는 둘째 시누도 서울에 와서 오빠와 올케가 믿는 하느님을 한 번 믿어보겠다고 하더니 89년 성탄절에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큰 시누도 10년 전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아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막내 시동생도 군에서 전역하던 주간에 바로 성당에 나갔고, 세례와 견진을 받은 후에 결혼하여 성가정을 이루어 지금껏 교회 봉사자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친정아버지는 2012년 전립선암으로 2년 동안 투병하셨는데, 돌아가시기 2개월 전 삼성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우구스티노란 이름으로 대세를 드렸다.

 

삶의 역풍으로 흔들린 신앙

2000629일 수요일 저녁, 남편은 잠시 밖에 나가고 없었다.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둘째 동서의 목소리는 울부짖음 그 자체였다. 엊그제 튀니지로 출장 갔던 시동생이 건설현장에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거다. 남편이 돌아오자 서둘러 시동생이 사는 부천으로 달려갔고 밤새 현지와 연락한 결과는 시동생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한다. ‘하느님 맙소사! 이럴 수가……, 이건 아니야, 분명 뭔가 잘못 됐어……, 절대 죽지는 않았을 거야.’ 계속 부인하였다. 시동생은 튀니지로 떠나던 날 인천공항에서 전화했다. “형수님, 튀니지로 출장 갑니다. 다녀와서 맛있는 것 사드리겠습니다.” 그게 마지막 인사란 말인가? 20년 동안 서울에서 동고동락하였기에 자식과 같은 시동생이다. 아내는 옷과 같고 형제는 수족과 같다며 동생들을 끔찍하게 아꼈던 남편의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다음날 기가 막힌 소식을 듣자마자 제주에서 식구들이 올라왔다. 집안은 한순간 풍비박산이 됐고 절망에 휩싸인 가족들은 넋을 놓고 말았다. 그때 무턱대고 고백소로 달려갔다. “주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집안의 기둥이며 가장인 시동생이 세상을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고는 엉엉 울고 말았다. 한참 후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집안이든 억울한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매님이 정신을 차리고 식구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가족들에게 돌아가십시오.” 닷새 후 튀니지에서 시신이 도착하여 관 뚜껑을 열어보니 며칠 전 건장하던 시동생이 시체로 뉘여 있었다. 울며불며 정신없이 장례를 마쳤지만, 가족들은 멍하니 쳐다볼 뿐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난 시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또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위해 매일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날마다 제대 앞에서 눈물의 기도를 드리다 보니 그토록 훌륭한 인성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함께 서른아홉 해 동안 한 가족으로 있었음에 감사했고, 남은 가족들이 고통을 극복하고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과 시동생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시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남편은 말수가 줄었고 술과 담배로 쓰라린 가슴을 달래곤 했다. 사실은 기도와 피정을 통해 슬픔을 승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13년을 보낸 후 남편은 3월 개학 이전에 건강검진을 받아야한다며 개인병원에 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 주치의가 췌장수치가 너무 높으니 종합병원으로 가서 자세한 검사를 받으라고 하는 거다. 우리는 당장 종합병원으로 갔고, 그날로 입원하여 절차에 따라 모든 검진을 받았다. 가슴 졸이던 일주일이 지나고 결과가 나왔다. 주치의는 보호자인 나와 막내 시동생을 밖으로 부르더니 암 부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췌장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말기입니다. 앞으로 4개월 정도…….” 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난 계단에 주저앉아버렸다. 청천벽력이 이럴 때 하는 말일까? 병실로 들어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뒤늦게 병실에 갔더니 남편은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다. 뜻밖에 시작한 병원생활, 항암제 투여, 대수술, 한방치료, 고주파온열암 치료 등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평생 배웠던 기도를 다 활용하여 오직 살아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이때 본당 교우들의 희생적인 기도는 평생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랑의 빚으로 남아있다. 살이 마르고 뼈가 녹아내리는 지난한 투병생활로 10개월이 흘러갔다. 병석에서 그와 나눈 대화들은 삶의 본질과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순수하고 해맑은 눈망울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마웠어, 한 평생 당신만 사랑했던 거 알지? 당신은 성모님과 같아…….” 죽음과 삶은 하나라고 믿었던 남편은 1415일 선종하기 하루 전 온 가족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하늘 문이 열렸다. 더 큰 시스템이 있다. 이 세상은 인큐베이터와 같다. 내가 먼저 간다.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살다가 천국에서 만나자. 모두 용서하고 사랑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하늘나라로 갔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통해 받은 은총과 축복

남편이 떠난 후 여러 가지 죄책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남편은 단 하루도 울지 말라 하였지만 난 바보처럼 울보가 되고 말았다. 기쁘고 즐겁게 다니던 성당이건만 성당에 가서 교우들을 바라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한국천주교 성지순례였다. 15920일 명동성당을 시작으로 16529일 양양성당 미사를 끝으로 한국천주교성지 111곳을 완주하였다. 순례를 하면서 드렸던 기도와 눈물이 마음 속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었고, 성지에서 발견한 수많은 성인들의 삶을 통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과 선교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 기도의 응답으로 생명의 축복을 주셨다. 161월 결혼 5년 만에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 가브리엘을 낳아 주었다. 복에 복을 더하여 191월에는 둘째 디모테오가 태어났다. 사랑스럽고 귀한 손자들을 양육하며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보다 손자들을 돌보는 것이 더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행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손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는 일이 생애 마지막 과업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렇게 손자들까지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 가족은 5대 째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집안이 되었다.

연초에 막내가 혼배를 올려 성가정을 이루었다. 또 한 생명이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들, 며느리, 두 딸, 두 사위, 네 명의 손자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믿음 안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이다. 이렇듯 직계 12명을 포함하여 시댁 친정 가족 40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직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형제자매들이 있지만 이들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의 방주에 오르게 될 것임을 굳세게 믿으며 기도하고 있다.

 

주님께서 펼쳐 주시는 인생 무대에서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였을 뿐, 나의 의지와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할 뿐이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나와 우리 집안을 위해 하신 봉사는 실로 위대하고 엄청나다. 봉사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며 축복이다. 오늘도 아버지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껴안고 성모님과 함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묵묵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