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머니, 나 물질 하지 않고 선생님 허쿠다!!

기도하는 어머니 2020. 4. 5. 09:48

 

며칠 전 네 살 된 손자와 이 담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가브리엘은 이 다음에 커서 무엇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나는 공룡박사가 되어 공룡과 이야기하며 놀고 실제로 만져 볼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는 커서 무엇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당황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 나는 가브리엘에게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어릴 적 추억의 옹달샘으로 달려갔다.

어린 시절에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꿈을 소환해야 했다.

 

나의 어릴 적 꿈은 해녀상군이었다.

어린 시절 삶의 무대는 농촌과 어촌이 어우러진 척박하기 그지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봄이면 산나물을 캐러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고 여름에는 바다에서 멱을 감고 가을이면 솔방울이나 말똥을 주워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 언니뻘이나 여자 어른들이 하는 일은 물때에 맞추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는 것과 바다에 나가지 않을 때는 밭에서 농사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삶의 환경이 만들어준 나의 꿈은 해녀일 수밖에 없었다. 동네 여자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바닷가에 나가서 헤엄치는 연습을 한다. 예닐곱 때까지는 발바닥만 잠길 정도의 바다에서 참방참방 개구리헤엄을 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조금 더 커가면서 단계적으로 깊은 물속에서 헤엄을 치게 된다. 혼자서 자유롭게 바다수영을 할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한 여름이 되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온 종일 선창가에서 헤엄을 치며 다이빙을 하며 실컷 놀다가 해가 저물어야 집으로 돌아간다.

 

바다 수영에 익숙해지면 어른 흉내를 내서 태왁을 매고 조금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맥질을 하여 여러 가지 해초나 해산물을 캐낸다. 어른들은 물질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물질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소라나 전복을 잡지 못하면 대신 잡아서 망사리에 넣어주기도 한다. 물질을 잘하는 상군은 넓은 바다로 나가 깊은 물속을 드나들며 소라나 전복을 더 많이 캐낼 수 있다. 해녀 상군이 되면 해녀 부장이 되어 마을 부녀들을 통솔할 수 있고 바다에 대한 총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녀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해녀들을 대표하면서 바다에 대한 실권을 갖고 있는 해녀 상군이 되고 싶었다.

 

물질만 잘하면 중학교 정도만 졸업해도 육지로 나가서 해녀벌이를 할 수가 있다. 해녀벌이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오면 집안 살림이 좋아지고, 동생들 학비도 댈 수 있다.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좋은 옷도 사다 줄 수 있다. 물질 잘하는 처녀는 소문이 나서 시집도 잘 갔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부모님도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열 두 살의 여름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좀 더 깊은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선창가에서 즐겁게 수영을 하며 놀았지만, 바다 수영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나는 혼자서 태왁을 매고 깊은 바다 속으로 풍덩 빠졌다. 물속에 빠지는 순간 파도가 밀려와 삽시간에 내가 의지했던 태왁이 물살에 밀려 가버렸다. 멀어져가는 태왁을 붙잡으려 했지만 다시 파도가 밀려와 태왁은 더 멀리 떠나 가버렸고 난 빈 몸으로 바다 위를 허우적거렸다.

 

사실 바다 수영에 미숙했던 나는 의지할 태왁이 없어지자 당황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기진맥진하였다. 두 손 두 다리에 힘이 빠지자 파도에 실려 깊은 바다로 떠내려가면서 하염없이 물속을 들락거렸다. 물속에 내려가면 다시 올라 올수 없을 것 같은데 바다 물을 실컷 들이마시고는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하였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이번 물위로 올라오면 구조를 요청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100m 정도 떨어진 선창가에서는 내 또래 아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중에도 나이가 많은 옆집 언니가 보였다. 그때 소리를 질렀다. ~~ 그리곤 다시 물속으로 쏘옥 들어갔다가 바닷물을 먹고 다시 올라와 ~~~~” “~~~~” 하고 외쳤다. 나를 목격한 언니는 정숙이가 복을 먹고 죽어가고 있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다음 물 위로 올라와서 볼 때는 언니가 내 쪽을 향해서 오고 있었다. 나는 그 후에도 수없이 물속을 들락 거렸고 언니가 내게 오는 것을 확인 한 후 의식을 잃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의 손길이 언니를 통하여 내 목숨을 구하였다. 그날 옆집 순이 언니는 내 생명의 은인, 수호천사가 되어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서 보았더니 나는 넙적한 바위 위에 뉘어져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를 쳐다보며 힘없이 말을 했다. 어머니, 나 물질하지 않고 선생님 허쿠다.” 어머니는 생각할 겨를 없이 그렇게 하라고 네가 살아났으니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순식간에 나의 꿈은 해녀상군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그 후 바다는 두려움이 대상이 되었고 무더운 여름에도 바다에 가기가 싫었다. 그리고 몸에 큰 병이 생겨서 밤이 깊어 잠을 자려면 헛것에 시달렸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점점 마르기 시작하였고 공부는커녕 시도 때도 없이 식은땀을 흘리곤 하였다. 어머니가 용하다는 무당에게 가서 나의 상태를 말했더니 그것은 물에 빠졌을 때 넋이 나간 것이라며 용왕이 처녀구신을 원했는데 내가 살아났으니 부아가 나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며 처녀를 만들어서 바다에서 귀양풀이를 해야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무당이 시키는 대로 볏짚으로 처녀를 만들었고 무명으로 옷을 해서 입히고 배를 만들어서 먹을 것과 볏짚처녀를 실어서 바다에 띄워 보내며 내가 물에 빠졌던 그곳에서 살풀이를 하였다. 용케도 그 후 식은땀이 나는 것도 없어지고 밤에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없어졌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없어지자 선생님이 되기 위한 숨은 노력이 시작되었다. 새벽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스스로 일어나 공부를 하였고 수업 시간에도 공부에 집중하였다. 학교 도서관의 책들도 하나 씩 읽어나갔다. 책을 읽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학교생활도 즐거웠다. 물론 성적도 쑥쑥 올라갔다. 당시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을 때였는데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 입학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지속되어 중학교 다닐 때도 좋은 성적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할 가정 형편은 되지 못하였다. 할머니 두 분이 병상에 누워있었고 동생은 밑으로 다섯 명이나 되었다. 농사일과 가사를 거들 일손은 늘 부족하였다.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할 형편이면 부산에 가서 취직을 해서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부산으로 가서 고모집에 살면서 국제시장에 취직하였다. 어린이 옷 소매를 붙이는 재봉사로 일을 하였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리 펼 틈도 없이 재봉틀을 돌려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발재봉틀이 있어서 재봉틀을 이용하여 인형 옷을 만들고 스스로 옷도 만들어서 입었던 것이 기술이 되어 어린이 옷 소매 붙이는 것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옷에 소매를 붙이다가 식사 때가 되면 식사 준비를 해서 언니들을 시중을 들어야 한다. 춥고 배고프고 마음대로 쉴 수도 없고 손과 발은 퉁퉁 부르텄다.

 

그해 겨울 부산의 날씨는 너무나 추웠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날 얼굴을 반쯤 가리고 영도다리를 무심코 걷고 있었는데 고향 어른을 만나게 되었다. 고향 어른은 나의 몰골을 보고 어떻게 된 것이냐며 집에 가면 부모님께 말씀드려 당장 제주에 내려오게 하겠다며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가만히 안아 주고는 배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면서 부둣가로 가버렸다.

 

그 어른 덕분에 다음 날 제주에서 당장 내려와 고등학교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전보가 날라 왔다. 나는 부산에서의 짧은 삶을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가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농어촌의 바쁜 시기에는 밭에 가서 일을 하거나 바다에 나가서 일을 거들면서 학교 수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꼭 되어야겠다는 의지는 항상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고, 상황이 어려워져 포기하려 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3이 되었을 때 예비고사를 보게 되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예비고사에 합격하였지만 부모님은 그것으로 만족하라며 대학진학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고 동생들이 많은데 언니가 집안 살림도 거들지 않고 대학에 간다면 나머지 동생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친척들이 찾아와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님들과 친한 친구가 우선 대학 입학 고사는 보고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때의 선생님과 친구를 잊을 수 없다.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면 나머지 동생들 공부는 책임져 가르치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한 후 부모님 모르게 입학시험을 보았다. 합격자 발표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영광의 합격을 한 것이다. 그때의 기쁨은 형언할 수가 없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라고 할까? 문제는 학비와 자치할 수 있는 자금이 있어야하는데 부모님을 통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 부모님께 합격 사실을 알리고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며칠 간 방에 틀어 박혀 밥을 먹지 않고 투쟁을 하자 아버지는 고집이 세다며 야단을 쳤고, 어머니는 어디에 가서 입학금을 마련해 오셨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생활은 입학금만 집에서 받아갔고 나머지 학비와 생활비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충당할 수가 있었다.

 

대학입학 후에도 우여곡절 끝에 4학년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다. 교사 자격증이 주어졌고 중등교사로 임용되어 제주도에서 2, 경기도에서 35년간 한평생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며 보람차게 교사생활을 하였다. 결혼 이후 세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교직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해녀 정신, 제주 어머니들의 강인한 정신력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힘들고 어려워 교직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내가 만약 해녀가 되었더라면 지금도 깊은 바다에 들어가서 물질하며 살지 않겠는가? 해녀 정신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가다 보니 어느 새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게 되었다.

 

정년을 3년 앞 둔 어느 날 기도 중에 이제는 교직을 그만 두고 나의 사도가 되어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한평생 나의 삶을 이끌어주신 주님의 음성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수석교사에 임명되어 교사들의 수업 컨설팅을 하며 행복하게 교직을 이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명예퇴직을 결심하였고 하상신학원에 입학하여 모든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교리교사와 선교사의 꿈을 이루어 주님을 위한 봉사자로 살고 있다. 물론 또 다른 봉사 두 손자를 양육하며 좋은 할머니로 살고 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네 살 손자의 할머니는 커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란 질문에 어릴 적 꿈이 되살아났고 지나온 삶을 추억해 보았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공룡박사가 꿈이라며 공룡의 세계 살고 있는 우리 손자의 꿈은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