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기도하는 어머니 2020. 9. 13. 17:12

58년 전 기억 속으로의 여행은 쉽지 않다. 며칠을 두고 지난 추억 속의 앨범을 넘겼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련하게 떠오를 뿐 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무의식 영역에 잠겨 있는 영상을 들추다 보니 몇 개의 개인적인 장면들이 또렷이 오버랩 된다.

 

엄마처럼 다정하고 포근했던 사랑의 학교

맏이였기에 부모님에게도 입학 경험은 처음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책 보따리를 지고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생애 첫 나들이를 하였다.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한 후 담임선생님이 발표 되었다. 담임은 예쁜 여선생님이었다. 앞장서서 우리를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친절하게 앉을 자리를 정해주고 생활 규칙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 여러분! 자기 이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봐요?”

저요, 저요!”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몇 명이 손을 들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지적을 받고 칠판에 나가 백묵을 잡았다. 며칠 전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큼직하게 이 정 죽이라고 썼다. ‘으로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가까이 다가와 손에 연필을 쥐어 주며 이 정 숙이라고 바로잡아 주었다.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하였던 부끄러움보다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이 엄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학교 가는 즐거움에 신이 났다. 하도초등학교는 나에게 또 다른 엄마를 만나는 장소였으며,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삶을 터득해가는 배움의 전당일 뿐 아니라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행복한 놀이 공원이었다. 또한 가을 운동회, 봄가을 소풍, 학예회 등을 통해 자신과 친구들의 끼를 서로 즐기고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무대였다.

 

월말고사가 바꾼 나의 운명

4학년부터 월말고사가 있었다는 것을 초등학교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께 배우는 것이 전부였고 참고서라면 동아전과와 동아수련장 뿐이던 시절, 공부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던 우리에게 힘겨운 과업은 매월 치루는 월말고사였다. 그리고 시험 결과 통지표는 집에 가져가서 부모님의 확인 도장을 받아야 와야 한다. 나의 첫 시험 성적은 반에서 16등이었다. 16등이면 공부를 잘한 것이라 생각하고 신이 나서 아버지께 아버지 저 16등 했어요.” 하며 자랑스럽게 통지표를 보여 드렸다. 당시 초가집 지붕을 덮는데 필요한 줄을 비고 있던 아버지께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통지표를 들여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찢어 버렸다. 아마도 큰 딸인 나에게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성적 올릴 궁리를 하다가 새벽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일어나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대로 실천 하였더니 시험을 볼 때마다 성적이 부쩍부쩍 올라갔다. 아버지는 매우 흐뭇해 하셨다. 공부에 자신감이 붙게 되자, 마음속에 품었던 해녀 상군의 꿈이 허물어졌다. 어린 시절 나는 해녀 상군이 되어 동네 앞바다를 주름잡고 싶었다. 차츰차츰 바다에 가서 물질을 하는 것보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더 쉽게 여겨졌고 흥미로웠다. 덕분에 선생님이 되는 꿈을 이루었고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며 한 평생 가르치는 일에 몸담을 수 있었다.

 

지혜의 샘이 되어 준 학교 도서관

5학년 신학기쯤이었나? 분명하지는 않다. 이른 저녁인데 동네 어른들이 학교가 불타고 있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동생에게 학교가 불타고 있으니 구경 가자고 하였다. 학교에 화재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많은 분들이 학교로 달려왔다. 동관(?)은 목재 건물이어서 불이 붙자 몇 시간 만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곳에 도서관도 있고 우리 교실도 있는데, 불에 타 재만 남아있는 현장을 바라보니 너무나 슬펐다. 어른들도 어리둥절하여 망연자실 하였다. 화재의 원인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학교는 마을 어른들의 도움으로 서서히 지어져 갔고, 그동안 우리는 각 부락으로 흩어져 공부를 하였다. 굴동 마을 회관이 있었는데 5학년 1(?)은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별다른 학습 자료가 필요 없던 시절, 칠판과 책걸상만 놓을 수 있으면 교실이 되었다. 교실이 가까이 있으니 등하교도 편했다. 우리 어머니는 급하게 볼 일이 있으면 다섯 살 남동생을 교실 뒤쪽에 데려다 놓곤 하였다. 쉬는 시간에는 남학생들이 내 남동생을 귀엽다며 데리고 놀아줘서 고마웠다. 불에 탄 교실이 완공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우리는 새롭게 지어진 교실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였고 신나게 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학교 도서관이 정비되어 새 책들로 가득 채워졌다. 새 책 냄새도 좋았고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때 읽었던 한국의 전례동화, 세계명작동화, 탐정소설, 과학소설, 어린이 잡지, 고전 등은 집에서 구입해서 볼 수 있는 책들이 아니었다. 이때 형성된 책 읽는 습관은 평생의 취미가 되었고 인성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주었다.

 

하도초등학교는 친정 부모님과 팔남매, 시댁 부모님과 오남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키워준 토양이며 들판이다. 아니 그뿐일런가? 하도라는 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왔던 모든 이의 마음의 고향인 것을, 이제 백주년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자라났던 어린이들이 대한민국의 동량이 되고 큰 인물로 우뚝 서 있음을 학교 운동장과 울타리 나무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해마다 학생 수가 감소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동문들 마음속에 심어진 어릴 적 모든 추억은 영원하리라 믿는다. 100년에 이르기까지 거쳐 간 스승님들, 선후배님들, 동창들의 건승을 빌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힘들어하는 이 시기에 초등 100년사 편집에 힘쓰는 동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또한 우리 동문들의 꿈과 희망이 열매를 맺고 정신적으로 연대하며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