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성지순례

대정성지(정난주 마리아의 묘) (103)

기도하는 어머니 2016. 5. 3. 22:57

대정성지(정난주 마리아의 묘) (103)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9 T 064-794-2074)

2016년 4월 28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용수성지에서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보고 난 후 대정성지로 향하였다. 용수 성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가는데 소요 시간은 30분이면 되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추워서 순례하기에는 좀 그랬지만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잘 나가고 있다. 정선 여동생이 차를 운전해 주어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언니를 위해 봉사하는 동생에게 주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주시리라 믿으며 함께 하고 있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신앙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면서 다녔다. 동생은 이제야 교리를 공부하는 중이다. 참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신제주 성당에서 교리를 받고 있는데 그래도 겸손하게 신앙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마음이 기특했다. 아마 오늘 순례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깨달음과 은총을 주시리라 믿는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현(정약종과 정약용의 맏형)의 장녀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이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자 배론의 토굴에서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백서는 주교에게 발송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해 황사영은 순교하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그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그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부인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정난주는 1801년 음력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 경한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인적이 없는 해안가 갯바위에 아들을 내려놓고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깊은 믿음과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이웃들의 칭송을 받는 가운데 37년 동안 신앙을 지키며 노비로 살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양모처럼 보양하던 집주인과 이웃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들판(속칭 한굴왓)에 매장하였다. 그가 비록 순교를 하지는 않았으나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10시 20분에 도착하여 정난주 마리아 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난주 마리아 묘역에서 참배하는데 목이 막히고 눈물이 솟구쳤다. 남편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어린 아들은 추자도 외딴 섬에 떨쳐 놓고 노비로 생활해야 했던 여인의 마음을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어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았을까? 37년을 노비로 살았으니 하루인들 아들 생각을 놓치지 못하고 아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어머니,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삼키려 했을까? 혹 아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 어떤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하며 지난한 세월을 살았을 여인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저려왔다. 오직 주님을 붙잡으시고 신앙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리라. 그래도 품위를 잃지 않고 교양을 갖춘 서울 할망으로 주변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은 천상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영생의 삶을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의정부교구에 위치한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를 참배할 때도 참으로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 오늘 이곳 대정에서도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다.

정난주 마리아 성인이시여 제주도를 굽어보시고 이 민족을 굽어보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