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묵상하다.(췌장암 10개월 투병 후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억하며)
1) 예기치 못했던 질병이나 고통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부재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이런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하느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으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사랑하며 살아왔는데,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믿음이 없는 이들이 잘 살고 건강하며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즐기고 있는데 흠 없는 나에게 어찌 이런 고통이 닥쳤는가? 원망, 한숨, 비탄, 좌절, 실망이 엄습하여 탄식한다.
2) 갑작스럽게 생긴 고통이나 불행의 원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뉘우친다.
믿음 생활을 했던 신자라면 불충했던 자신의 삶과 참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살아 왔음을 성찰하고 뉘우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치유를 해 주신다면 잘 살아보겠다고 탄원의 기도를 올린다.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온갖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며 하느님의 치유의 손길을 바란다. 죽음은 영원한 삶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하지만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을 두고 먼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처절한 심정은 표현할 길이 없다. 그가 수많은 밤을 통하여 고뇌했던 심리적 정신적 고통들…
3) 고통이 극한 상황에 달하면 그 누구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밤은 내 뼈를 깎아 내고 나를 갉아 먹는 고통은 잠들지 않네”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한 달간의 암의 통증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느님께서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견딜 수가 없다. 오직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필요하다. 아내도 자식도 부모형제도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를 위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이 녹아내리고 뼈가 으스러지고 아픔이 온몸을 흔들어 댄다. 차라리 죽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어렵다.
4) 하느님의 뜻이 죽음이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받아들인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했던 주님처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선종의 은총을 빌고 또 빈다.
“이 세상은 인큐베이터! 이 세상은 인큐베이터! 더 큰 시스템 하느님을 찾아라.”
운명하기 전날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다. 이렇게 죽음으로 그의 인생은 완성되었다. 그는 욥과 같이 세상에서 잃었던 모든 것을 하늘나라에서 두 배로 받아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고 있다.
5) 고통은 필요악인가? 가장의 아픔을 통하여 집안이 정화되고 있다. 태풍이 자연을 정화시키는 힘인 것처럼 가장의 아픔과 죽음을 통해 가족들이 달라지고 있다. 고통을 함께 체험한 가족일수록 신앙이 깊어지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며…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은 땅과 바다, 빛과 어둠, 기후, 하늘과 동물세계, 대자연의 주재자임을 고통을 축복으로 변화시키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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