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신학원

나의 유언장

기도하는 어머니 2015. 3. 11. 23:31

유언장

제24기 이정숙 마리아

3월임에도 동장군은 떠날 줄을 모르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봄을 시샘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서도 봄날이 오기가 그렇게 어렵듯이 자연적인 봄을 맞이하기도 쉽지 않은 듯하다. 난 지난 2월 28일로 교직 37년을 정리하고 하상신학원에 입학하였다. 주님에 대한 열정과 무엇이든 더 알고 싶은 욕구가 나를 쉼 없이 도전하게 만들었다. 입학식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열심히 해야겠다고 의욕이 충만했다. 강의 첫 주 월, 화, 수, 목, 금 5일 동안 수업이 이어졌고 나는 부대표가 되어 이런저런 것들을 챙기며 학교생활에 맛을 들이고 있는데 주말부터 느닷없이 감기 손님이 찾아왔다.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이 아니고 감기에 걸렸다고 해도 살짝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며칠 만에 정리가 되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은 그렇지 않다. 며칠간 밤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기침과 콧물과 두통과 근육통이 겹쳐서 살 수가 없을 지경이다.

토요일 저녁에는 주님께 이런 아픔을 주신 까닭을 여쭈었다. 하느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님 제가 지금 당하는 고통은 무엇입니까? 어찌 감기하나 이기지 못하고 이토록 헤메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의미를 알게 해주십시오. 주님 제발 자비를 베푸시고 제게 힘을 도와주소서 이 질병에서 벗어날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목이 터지게 울었다. 한참 울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니 주님께서 조용하게 말씀하셨다.

"딸아, 너는 육십 넘은 나이에 삼십대 젊은이도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중첩으로 하고 있구나. 네가 하는 일에 지금 과부하가 걸렸다. 성령 기도회장으로 세미나 개최를 해야 하는 모든 문제와 교리교사교육을 받는 것, 신학원 다니는 것, 그림 그리는 것, 신학원에서 과대표를 하는 것 등 네가 평소에 하던 것에서 모든 것이 넘치고 있으니 마음을 비우고 할 수 있는 것만 하도록 하여라." 그 순간에 깨달음이 왔다.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몸은 육십을 넘어 감당할 수 없다고 데모를 하는 것이다. 이 지독한 아픔을 혼자서 겪어야했다. 함께 사는 딸도 냉정하기 그지없고, 멀리에 사는 딸도 문자 메시지 한 번 날리고는 소식이 없다. 아들은 토요일부터 엄마가 분명 감기로 고생한다고 하였지만 전화 한 통 없다. 이것이 내가 처한 상황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편이 살아 있었으면 응석도 부리고 행동이 과하면 통제도 해주는데 이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하고 싶은 것들을 백화점처럼 늘어놓고 있으니 몸이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누구도 통제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렇다면 죽음도 멀지 않구나. 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얼마나 많은가? 난 3일간의 지독한 기침과 아픔으로 고통을 겪는데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고 10개월간 투병을 했던 남편을 생각하며 미안한 생각과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정도의 아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가 하고 여기저기 구걸하는데 내 남편은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 둘이서 이 병마와 싸워 이겨야한다며 용기를 내고 기도하고 자비를 청하지 않았던가? 그는 끝까지 뼈가 마르고 살이 녹아내리고 온 몸에서 물이 다 빠질 때 까지도 웃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가족들에게 웃음을 주지 않았는가? 난 그런 남편의 태도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죽음 가까이에서 죽음을 생각하는데 과제 중에 유언장을 쓰는 과제가 있어서 이참에 아예 유언장을 써놓자는 생각을 하였다.

주님 앞에서 60생애를 어떻게 살아왔으며 주님 면전에서 지금 일생을 셈을 바쳐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 영원한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지켜주시고 돌봐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것이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그 순간에 기적적으로 살려주시고 새로운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면서 키워주시고 이끌어주심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둘째 :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하느님을 알게 해주시고 무엇보다 천주교 신앙을 주셔서 믿음으로 승리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불교에서 개신교로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옮겨가면서 나의 영성 생활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셨음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

셋째 : 천주교 그 많은 신심 단체 중에서 성령기도에 몸담아 30년을 살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기도회를 통하여 회개와 보속과 치유와 영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매주 화요일은 기도회에서 영적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나누고, 찬미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또한 봉사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신앙의 나무를 줄 곳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넷째 : 천주교 신앙 안에서 많은 영적인 동지들을 주셨고 수많은 대녀들을 두어 이 길을 함께 걸어가며 어려울 때 의지하고 부족할 때 서로 채워주고 힘이 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다섯째 : 신앙의 불모지에 신앙의 뿌리를 내려 가족 모두를 천주교 신자가 되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묵주기도 심령기도 관상기도 등을 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시고 문제문제마다 기도로 모든 매듭을 풀게 해주셔서 시댁 5남매의 모든 형제자매와 시할머님과 시어머님, 조카들까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친정에는 두 형제가 천주교 신앙을 믿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섯때 : 교직 생활 37년을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투철한 사명감으로 완수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리자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평교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리게 해주셨고 무엇보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동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곱째 : 한 남편의 아내로서 오직 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부부로 삶의 모범을 보이고자 했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남편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나의 신앙을 인정하고 자신의 믿음으로 천국을 얻어 더 큰 시스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며 하늘 아빠 하늘 엄마를 노래하며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십자가 밑에서 당신의 성혈로 그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불사불멸의 몸으로 부활시켜 지금은 천국에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여덟째 : 제게 두 딸과 아들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실하고 착하게 신앙 안에서 성장하여 큰애도 시집가서 성가정을 이루며 잘 사고 있고 아들도 며느리와 함께 신앙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막내가 혼인 전이라 조금 걱정은 되지만 그 아이도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잘 알고 모든 일을 잘 수행하기에 그 아이의 앞날도 주님께서 살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홉째 : 제게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린 날 상처가 있었지만 그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엄마가 낳아 준 4남매 아빠가 낳아 준 6남매 나와 동배에서 태어난 자매 모두 12남매가 서로 화목하게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열째 :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사해주시고 날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며 성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은총과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특은을 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이제 마지막 이 영혼 아버지께 맡기오니 아버지의 뜻대로 받아주소서 전 생애를 통해 주님께 드릴 것은 감사, 찬미, 사랑, 기쁨, 행복, 평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