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

인생은 피정이다.

기도하는 어머니 2012. 8. 1. 22:27

다음 주 월요일 6일부터 예수 고난회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4박 5일 간의 침묵피정을 하게 된다. 남편 바오로가 기도학교를 졸업하면서 한 번 침묵피정을 해보라고 권해서 가는데 사실은 벌써부터 침묵 피정을 하고 싶었다. 어제는 남편이 인생 피정이란 책을 권해주었다. 오늘 아침 미사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묵상과 침묵 중에 최근에 깨달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신비롭고 경이롭고 하느님께서 피정에 대한 묵상을 미리 준비시켜 주시는 듯하여 감사하며 집중하여 읽었다.

이제민 신부님이 쓴 인생 피정 중에서

「몸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있다. 나의 몸은 내가 누군지 알게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고, 내놓기 위해서도 있다. 그 ‘내놓음’에서 비로소 ‘내’가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 하신 것도 이런 측면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곧 자신의 영역을 자신의 살(피부), 형제자매, 친지의 테두리에만 묶어 두지 말고 저 먼 우주까지, 태초의 순간까지, 하느님의 영역까지 확장시켜 나가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때에 자신의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은 공동체의 장소이며, 만남을 향한 개방의 장소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멀리 확장시키면 시킬수록, 자신의 존재를 종말을 향하여 열면 열수록 자신을 더 잘 알고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저 미지의 나라 한 인간에게까지 자신의 존재를 넓혀 가야 한다. 그럴 때 더욱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 현존해 계시면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촉구하신다. 르완다 내전으로 죽어간 사람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으로 죽은 자들과 피해자들, 우라카미 성당에서 한꺼번에 하느님의 제물이 되어버린 수천의 신자들, 1,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죽어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 사삼사건과 육이오사변으로 인하여 죽어간 동포들, 낙태로 인하여 죽어간 영아들, 연옥에서 가장 버림 받은 영혼들, 911테러로 인하여 죽어간 이들, 스촨성 대지진, 인도네시아 쓰나미, 아이티 대지진, 이라크 전쟁, 후쿠오마 대지진 등 인종, 종파, 이념을 넘어 죽어간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하신다. 나의 의지나 생각대로 드리는 기도였다면 언제 끝났을 것이다. 이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기도이기에 끊임없이 봉헌되고 있다. 역시 내안에 주님이 살아계시는 한 이 기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5대양 6대주 지구 공동체를 위하여 우주창공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으면 끊을수록 자신을 잃는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지 못하고 부모나 가족, 친척의 주위만 맴도는 경우를 많이 본다. 고작 학연, 지연을 따지며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도 수없이 많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하느님에게까지 확장시킨 장소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으로 이 ‘나’를 찾은 첫 번째 존재셨고, 이로써 우리의‘나’를 찾게 해주신 분이다. 예수님의 ‘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나’, 자연의 ‘나’, 우주의 ‘나’, 사회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역사상 한 점에 불과한 2천여 년 전의 한 시점에 태어나 살다 가신 예수님이 어떻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의 물음에 답변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2천여 전 전의 예수님을 지나 아브라함 이전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 곁에 계신 그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영원’을 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나는 내가 하느님 모상임을 알게 된다. 그분 없이 우리는 존재로 불릴 수 없는 존재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모든 역사가 나아가야 할 목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이(것)의 시작이요 정점이며, 예수님의 ‘나’야말로 모든 이(것)의 ‘나’이다. 예수님 없이는 그 무엇도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것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당신의 시간과 몸으로 당신의 존재를 태초의 순간과 공간에서 찾은 분이시다. 그분은 창조의 순간을 말씀과 행위로, 온몸으로 사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태초의 순간에까지 옮겨 놓아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자 해서이다. 예수님의 복음과 가난에서 예수님의 ‘나’를,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나’를 찾게 된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구원)은 인간이 ‘지금’ 활동하며 살아가는 ‘여기’에 (감추어)있다. 예수님 이전의 인간은 행복을 자신의 삶 바깥 영역 어딘가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이 영원과 만나는 장소라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을 수 있고 또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지상에 가까이 와 있다고 선포하신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야 하고, 지금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지금’을 놓친 사람은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 들지 못할 것이다. 천국은 처음부터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상을 떠난 다른 어떤 곳에서 천국을 찾으려는 것은 마치 공중에 씨앗을 뿌리려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허황된 짓이다. 천국은 씨앗처럼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지상을 덮고 지상에서 체험된다. 지상은 하느님이 현존하는 곳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계관과 종교관을 원칙적으로 부인하셨다. 그분의 복음에 의하면 종교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이 지상에 도래하였고, 이 때문에 지상과 천국의 이원론이 이 지상에서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와 있음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곳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회개의 장소요 깨달음의 장소이며 부활의 삶을 체험하게 해주는 장소이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천국과 지상, 고통과 천상의 행복이 만나는 장소이다. 십자가는 고통의 절정이며 인생이 십자가로 표현되는 것은 그 안에는 온갖 고통과 한이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태초의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기가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좌절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 구원이 달려 있는 위안의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요구하신 것은 단순한 도덕적 성찰과 뉘우침의 요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 이웃과 원수, 성과 속 등 이원화된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돌아서서 시공 안에서, 속됨에서, 원수에게서, 심지어는 지옥에서조차 하느님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는 궁극적으로 현실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며, 갈라놓는 마음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적 새 시작을 향한 힘을 약속하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어떤 꿈의 실현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변화되기 싫어하는 바로 그곳에서 변화되기를 촉구하신다. 회개는 현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 회개는 현실과 미래를 이원화시키는 사고와 그로 말미암은 현실 부정의 세계관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받아들이고 적극 참여하도록 해 준다.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따지기 전에 모든 인간은 나에게 항상 ‘가장 가까운 이’, 이웃으로 대하라고 하신다. 회개한 사람은 복수에 대한 마음을 폐기 처분하고 원수를 가까운 이로 맞아들이는 결단을 하며, 언제든 화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며 이웃을 향하여 산다.

낮음을 향한 회개 자신을 마지막 자리에 두는 것, 곧 자신을 낮추는 행위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과의 전적인 유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린이가 되라는 예수님의 요구와도 일치한다. 소유와 권리와 명예를 지향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순수한 상태에 이르라는 말씀이다. 참자유인은 참사랑의 인간이다. 참사랑은 참자유를 얻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다. 참된 사랑은 모든 이원의 벽, 특히 이웃과 원수의 벽을 무너뜨릴 때 가능하고 이런 이원의 벽은 자유의 인간만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은 ‘남과 나를 가르고 이웃과 원수로 구분하는 이원의 벽을 허물어라, 참자유인이 되어라.’라는 말씀이다. 자유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행위에 거침이 없어지고, 그 모든 행위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모든 사람의 행위가 내게 귀엽게 보일 때 그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순수하게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롭기 위하여 인간은 사랑을 배워야 한다. 가장 자유롭고 사랑할 때는 ‘기도하는 순간’이다. 기도하는 순간에 인간은 자유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자유와 사랑을 얻으려 하는 것이 도리어 자기 자신을 오만한 힘의 노예가 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의 마음가짐이 자유로워지고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데 그친다면 그 기도는 거짓된 기도일 뿐이다. 태초에 하느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인간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 되며 사랑의 인간이 된다. 가장 자유롭고 사랑하는 인간은 순수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한한 자유인의 모습이셨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들의 모습(마태 14,23)이셨다. 기다릴 줄 아는 인간은 순명할 줄 안다. 그리고 순명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인간은 순명을 통하지 않고는 참다운 자유의 인간, 참사랑의 인간이 될 수 없다. 생명에 순종하며 태어난 인간은 마지막 죽음에 순종하며 생명의 원천에 귀의한다. 순명이 없는 곳에서는 생명에 대한 신비도 사라지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대자연처럼 순명의 삶을 사셨다. 하느님에게 순명하여 인간이 되셨고, 요한에게 순명하여 물속에 잠기는 세례를 받으셨고, 때리면 맞으셨고, 수염을 뽑으면 뽑히셨으며, 못 박으면 못 박히셨고, 죽이는 인간에게 순명하여 죽으셨다.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순명하신 것이다. 순명하는 사람은 ‘보다 깊은 차원으로부터 듣는 사람’이다.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소리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통해서 전달된다. 때로는 내가 싫어하는 소리를 통해서도 들려온다. 이 소리를 듣는 인간은 복되다. 이 소리는 억지로 들려줄 수 없다. 그것은 본이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모든 순간에 만나는 사람들, 내 마음에 들고 좋은 사람만이 아니라 원수 같고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고 저주하고 싶은 사람까지,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 모두가 내가 순명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순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사람들이다. 이를 깨닫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순명하기란 그처럼 어려운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순명은 인간에 대한 순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피정은 쉼이며 창조의 시간이다. 쉬는 가운데 창조와 재창조가 일어난다. 모든 것은 사실 조용한 가운데, 쉬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변화다. 피정은 변화를 몸으로 입는 시간이다.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나’라는 인간 안에 들어와 변화하며 탄생시킨 작품이 새 인간이다. 영원한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새로 탄생시킨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진정으로 봉사하기 위해 회개하는 사람,  순명하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된 봉사는 태초의 순간에 귀 기울이며 사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에게서 나온다.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봉사를 하면서도 은근히 반사 이익을 바란다. 조그만 칭찬이나 보상에 고무되기도 하고 무관심에 사기가 저하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근원을 둘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기쁨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훈련해야 한다. 인생은 피정이다. 이 피정은 지극히 어렵고 힘든 작업이어서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연필로 보이지 않는 인생 노트에 우리의 물음과 답변들을 적으며 화두를 풀어나가야 한다. 언젠가 연필이 다 닳아지고 인생 노트가 다 채워지는 날, 우리는 다시 쉼의 상태로 창조와 재창조의 숨터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내 인생의 노트가 결코 나만의 힘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어차피 그럴 수 없는 것이 내 인생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인생 노트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려 주실 것이다.

피정에 대한 깊은 묵상, 회개에 대하여, 참자유에 대하여, 참사라에 대하여,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순명에 대하여, 십자가에 대하여 묵상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신부님의 묵상 결과로 빚어진 참되고 거룩한 말씀임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값진 가르침인가? 하느님께서 내 인생 노트에 또 다른 깨달음을 채워주셨다. 이 모든 은총과 축복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을 알고 믿고 사랑할 힘과 용기를 주시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하여 자유를 주시고 순명을 깨닫게 해주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