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

십자가 바오로의 영적 지도

기도하는 어머니 2012. 10. 10. 09:48

“성령께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 내면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거룩한 기도에서 내면의 사랑스런 충동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잊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를 부드럽게 이끄시는 영으로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신앙의 성스러운 침묵 가운데 우리들 내면에서 하느님의 거대한 사랑에 온전히 빠져들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길을 가르치더라도, 그 길은 언제나 예수님의 거룩한 삶, 고난과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할 것이다. 기도란 우리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는 것이다.”

“가장 거룩하고 훌륭하게 기도하는 방법은 주님의 가장 거룩한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과 거룩한 일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 시작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되지는 않는다.”

“기도 중 성령의 내적 지도에 순명하여라. 거룩한 영께서 네 영을 부드러운 미풍이 부는 곳으로 자유로이 나르게 하여라. 네 내면을 고요하게, 평화롭게, 자신만의 골방에서 홀로 주님과 있게 하여라. 그분 안에서 쉬며 사랑의 거대한 바다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하느님께서 가르치시리라.”성령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배우자와의 관계와 같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이끄신다. 하느님을 단순히 이득의 원천이나 도움 혹은 인생의 공동 조종사로 보느냐 아니면 자기 인생의 유일한 사랑으로서 다른 모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과 생명을 주는 분으로 체험하느냐가 모든 차이점을 만든다. 바오로는 우리가 허락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거룩한 사랑과 순수한 신앙으로 내적인 고독 속에 평화롭게 머물며 하느님의 품에서 쉬어라. 거기서 너는 모든 좋은 것을 다 발견하리라. 모든 상황과 모든 사건에서 몸과 마음에 방해됨이 없이 내적인 고독을 체험할 수 있다. 영혼의 가장 고상한 부분 그 성소에서 평화롭고 부드럽게 신앙을 되살려 일으키고 사랑의 관심을 쏟음으로써 잠심은 가능하다.”

“영혼의 열등한 부분에는 우리의 두려움, 혐오, 욕망, 충동, 괴로움, 원한, 급한 성질 등이 담겨져 있다. 영혼의 상위 부분에는 정신과 마음 그리고 지성과 자유의지 혹은 선택하는 힘들이 있다. 우리가 잠심하게 되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주로 이 상위 부분에서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사랑하는 것은 이 능력을 통해서이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시련은 우리의 사랑을 정화시키고 발전시킨다. 강령한 유혹의 태풍이 지난 후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에 좀 더 평화롭게 머룰 수 있게 되었음에 놀라지 마라.”

영성체는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녹이는 것 사랑의 위대한 성사를 통해 그분을 끌어안음을 중단하지 마라. 모든 재갈을 풀어 버려라. 예수님의 무한한 덕으로 너를 위해 준비된 그 영광으로 자유롭게 고양되도록 네 자신을 놓아 버려라.

“영적 지도자는 매우 많이 배운 사람이어야 하며 많은 경험과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영적 지도는 고상하지만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바오로에게 신비적 죽음이란 초연함 그 자체였다. “성령의 은밀한 내적 초대에 가능한 한 순명하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온전히 이탈하여,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진실로 신비적으로 죽고, 가난한 영으로 헐벗어 예수님의 순수한 믿음과 거룩한 사랑을 온전히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면의 평화와 기쁨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체험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 밀알의 죽음을 이용하여 바오로는 영혼은 하느님께서 수확을 얻으려고 교회라는 거대한 밭에 뿌린 밀알이다. 영혼은 고통, 모순, 슬픔, 박해 등으로 죽어야 한다. 영혼이 고통의 와중에서 모든 것에 대해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하느님의 선물로 생겨난 영의 즐거움에 머물지 말라고 나는 권합니다. 매순간 내면의 피신처인 하느님께로 피신하십시오. 고통도 기쁨도, 통찰이나 영의 이해도 없이, 온전히 벌거벗은 신앙과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가슴에 쉬면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입고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것을 알게 하시지만, 올바른 길을 갈 때는 보통 침묵하신다. 올바른 길을 갈 때는 어떤 표지도 필요 없다. 하느님의 침묵은 좋은 표지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그분은 침묵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네가 창조된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기를 바라신다. 그것은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신비적으로 죽는 것이다. 네 천상의 배필이신 분의 목소리를 들어라. 모든 것을 버리고 네 자신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가슴에 안긴 아기처럼 작게 하여라. 그분이 너를 인도하게끔 하여라. 그분의 거룩한 뜻에 너를 맡길수록 하느님을 기쁘게 할 것이다. 단순한 아이로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가슴에서 쉬면서, 네 자신의 그 모든 근심 걱정 욕망 심지어는 좋은 의도까지 다 버리고 쉴 때, 진정한 내적인 고독 속에서 온전한 포기를 하게 되어 거룩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바오로는 아기의 특성을 두 가지로 생각했다.

하나는 어머니가 가는 데로 따라가는 유순함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모든 것을 다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근심걱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바오로는 그가 지도하는 사람들이 아기들처럼 성령의 인도를 유순히 따르며, 하느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돌봄을 믿고 완전히 평화롭기를 희망했다.

바오로의 마음에는 언제나 사랑이 으뜸이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보여주신 모범은 확실하다.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서로 사랑 하여라. 서로 사랑 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임을 기억하라. 너희들 사이에 불화가 없게 하여라. 네가 뜻하지 않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되면 즉시 부드러운 말로 고쳐라. 네 마음이나 네 말을 비난이 점령하지 못하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