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 이후?
여러분은 죽음 그 이후 무엇이 오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영원한 생명? 지복직관? 연옥? 지옥? 등등
나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어떤 상태로 머물 것인가?
이정숙 마리아
2015년 11월 10일 기도회 묵상
1. 시작 기도 :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분께서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죽음 그 이후’란 주제를 정하고 참으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였습니다. 누구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죽음의 문제는 인간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예수님을 모른 채 세상에서 살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법에 따라 공부하고 성공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권력을 잡고 우쭐거리며 세상의 주는 행복과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통해 어떤 사건을 통해 또는 이웃의 도움으로 성교회에 와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례는 첫 번째 죽음을 뜻합니다.
“처음 태어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분노의 그릇이었지만 다시 태어날 때에 자비의 그릇이 될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 출생은 우리를 죽음에로 이끌고 두 번째 출생은 생명에로 되불러 주었습니다. 세례받기 전에는 우리 모두가 마귀의 신전이었지만 세례 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해 좀 깊이 생각 해 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되고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우리 마음에서 마귀를 쫓아내고 우리 안에 당신의 성전을 마련해 주신 만큼,우리의 영혼을 청결하게 보존하여 주님께서 친히 거처하시고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
세상에서 살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한 번 상상 해 봅시다.
체면의식, 자존심, 우월감, 열등감, 불안, 초조, 걱정, 탐욕, 헛된 욕망, 불편한 관계들, 경쟁, 질투, 비교, 우울함, 고독, 이기심, 교만, 방탕, 쾌락, 세상적인 재미, 자녀들에 대한 집착, 남편의 성공, 어두움, 절망, 살아있지만 죽은 자의 삶이었습니다.
→ 지옥의 삶(하느님 부재의 삶)
2. 첫 번째 죽음 : 세례 후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이 주어짐)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2티모 2,11)
1)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 :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4, 4-7)
세례 : 인호, 자녀, 지체, 교회의 백성, 성령의 궁전
견진 : 성령칠은, 은사, 열매, 사랑의 삶
전례 : 교회 생활의 정점이며 원천인 미사 안에서 파스카 신비를 날마다 새롭게 체현하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삶
2)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3) 질병과 마귀로부터의 자유 :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마태 12,22) 영적인 치유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자유인으로 살아가지만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 질병과 가난이 언제나 올가미가 되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끝없는 영신 수련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으로 우리를 양육하시고 성장시키십니다.
3. 영적 훈련 과정 : 아빌라의 데레사가 영혼의 성에서 말하는 영적 훈련
1) 1궁방 : 독충과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방 (독충은 죄이고 벌레는 상처와 악습이다) 기도를 통해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지은 죄와 나를 억압하고 있는 상처와 악습들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고 상처를 치유 받고 악습들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2) 2궁방 : 작은 독충과 벌레가 남아서 영적 갈등을 일으키는 방 (내 뜻/하느님의 뜻)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이 서로 충돌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따른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내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때론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허무하고 야속하고 응답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실망과 좌절을 거듭하게 됩니다. (영혼의 어둔 밤 체험)→연옥의 삶
3) 3궁방 : 정화를 마치고 조명의 문에 들어서 빛이신 주님을 직접 뵈옵는 영적 시기 그러나 전례, 피정, 기도, 묵상, 성체 조배, 신심행위들을 통하여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삶도 내게 속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하시도록 의탁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당신의 신비를 보여주시고 사적인 계시를 통하여 당신이 현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내적으로 조명해 주심으로 죄악을 깨닫고 나를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4) 4궁방 : 초자연적 기도로 은총의 수도관에 입을 대고 먹는 시기 (주부적 덕행 수동적 관상)이제는 기도가 주님의 뜻에 따른 기도가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의 뜻을 포기하게 되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고 단순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게 됩니다. 수동적 관상이 되면서 기도가 일상이 됩니다.
5) 5궁방 : 하느님과 맞선을 보는 단계로 일치되기 위한 준비의 때
미사 전례와 기도, 말씀, 이웃, 가족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보게 되고 수난하고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를 깨닫게 되면서 성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영성체할 때마다 주님께 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온전하게 봉헌하며 전 존재를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모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합니다.
6) 6궁방 : 예수님과 약혼의 시기로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드러내시는 시기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그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호세 2,21-23)
7) 7궁방 : 신비적인 혼인의 시기로 깊은 일치를 이루는 최고의 단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19-20)→ 천국의 삶
4. 두 번째 죽음 (간접 체험) : 남편의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삶을 묵상함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갔던 우리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췌장암이란 죽음의 사자가 들이닥쳤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습니다. 혼란과 갈등 속에 하느님께서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의 믿음은 어디에 갔는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얼이 빠져 불안하고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저것 병은 하나인데 치료 방법은 부지기수였습니다. 남편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못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최고의 의사를 찾아갔고, 영적인 능력을 받은 분들을 찾아가 기도를 받았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치료 방법, 자연 식이 요법, 한방 요법, 운동 요법 등 좋다는 것은 모두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늦게 발견된 병마 앞에서 모든 것은 허무였습니다. 30년 동안 배운 기도 방법을 다 동원했고 미사와 치유기도 등 하느님 앞에 탄원과 눈물의 기도를 날마다 바쳤습니다. 죽음이 현실화되기 전까지 남편이 죽어서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학교도 휴직하고 하루 24시간 그의 곁에서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였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며 내가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그를 돌봤습니다. 주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오직 사랑하는 마음밖에는 없었습니다. 10개월의 투병 후 남편은 주님의 품에 안겨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형 선고를 받고도 남편은 의연했습니다.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2013년 5월)“내가 돌아가도 걱정하거나 놀라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그리고 신앙인에게는 죽음과 삶이 하나이다.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당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살아라. 나는 당신을 믿는다. 힘들고 외로워도 참아야 한다. 나는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2013년 12월 3일 아침 7시 쯤)
“나는 하느님의 길을 가고 있다.
90%쯤 올라온 것 같다.
어머니에게도 말씀드려라.
내가 먼저 간다.
예쁘게 잘 살다가 나중에 오라.
준비되면 내가 데리러 오겠다.
고맙다. 아름답다. 착하다.
당신은 지금까지 예쁘게 살았다.
사랑한다.
단 하루라도 울지 마라.
울 일이 없다. 나는 행복하다.
용서하지 못한 것도 없고
용서받지 못한 것도 없다.
욕심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다.
남의 도움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으니
이 또한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게 살았고 부족한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끝없이 노력을 하는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겸손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겸손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돌아가기 이틀 전 (2014. 1. 4)
세상은 인큐베이터! 세상은 인큐베이터! 세상은 인큐베이터!
더 큰 시스템이 있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어라.
(며느리에게)
‘너는 나의 딸이다. 착하다. 걱정하지마라. 모두가 잘 될 것이다.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한참 후
하늘 문이 여섯 개가 열려있다.
하늘 아빠~ 하늘 엄마~ 루룰라라~ 룰루랄라~
영혼은 마치 하느님을 마주 보고 있는 듯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1월 6일 아침 10시 37분 숨을 멈추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천사처럼 부드럽고 고운 얼굴로 고요히 숨을 멈추었습니다.
장례식(1월8일)을 마치고 삼우제를 지낸 후 찾아든 공허함, 허무함, 외로움, 쓸쓸함, 불면증, 죄책감, 미안함, 후회스러움, 우울함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슬픔들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조차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같이 느껴져 두려웠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습니다. 하루도 단 하루도 울지 말라고 하였지만 저는 날마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성체조배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Q : 주님 왜 바오로를 일찍 데려가셨습니까?
A : ‘내 아들은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었고 지금은 나와 함께 있다’
Q : 그는 지금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A : 그는 하늘에서 지복직관의 삶,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Q : 저는 언제 데려가시렵니까?
A : 네가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으면 그 때 데려갈 것이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섭리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안식과 빛을 주었으며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살아있을 때 그토록 열망하던 분을 만나 영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눈물을 닦고 그의 뒤를 따라 지복직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사별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120일 미사를 봉헌하며 그와 함께 살았던 결혼 35년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달에 한번 씩 드리는 고백성사 안에서 치유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읽으면서 나보다 더 아픈 상처들을 보았습니다. 그나마 나는 가장 행복한 과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그와 함께 동행 했으며 그가 남겨준 정신을 되새기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정리해 놓고 간 파일들을 보면서 그가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알게 되었고 책꽂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5. 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안셀름 그륀 (안셀름 그륀이 죽음에 대한 묵상)
1)죽음 후에 무엇을 희망해야 하며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죽음은 삶의 몰락이 아니라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죽더라도 부활하게 될 인간의 본질에 합당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살고 있지만 죽음 자체가 지닌 슬픔과 어두운 형상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죽음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 생명, 자유, 행복에 대한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영혼은 궁극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갈망을 지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고유하게 새겨주신 당신 모상을 가린 너울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벗겨질 것이며 죽음 후에야 우리가 누구인지 온전히 밝혀질 것입니다.(안셀름 그린)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2,9)
1) 심리학에서 본 죽음 : 융은 1934년 발표한 논문 「영혼과 죽음」에서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물음을 심리학 측면에서 다루었다. 영혼은 그 깊은 곳에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매여 있지 않은 다른 형태의 삶, 곧 ‘영원’과 같은 어떤 것이 있음을 느낀다. 심리학은 많은 인간과 문화 안에는 죽음 이후에 대한 신앙과 희망이 현존함을 인정한다.
2) 철학에서 본 죽음
• 플라톤 : 죽음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했다. 육신 안에서 마치 옥살이처럼 마지못해 거주했던 불멸하는 영혼이 죽음으로 해방되어 신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 카를 라너 : 죽음을 통해 인간의 영혼은 참으로 어렵게 이해되는 세계의 모든 사물이 상호작용으로 서로 뗄 수 없이 일치하는 세계의 실제 기초와 밀접해지고, 내적으로 더욱 깊고 충만한 관계를 맺는다.
• 라디슬라우스 보로스 : ‘죽음은 소유 상황을 존재 상황으로 변형하는 순간이며 죽음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봉헌할 수 있다.’ 즉 죽음을 통해 인간의 삶이 완성된다.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 : 인간은 하느님이 알아주고 사랑해 주시기에 전적으로 사멸할 수 없다. 육신의 부활은 영혼에 옛 육신을 돌려주는 것이라기보다 인격의 부활을 뜻한다. 인간의 본질적인 것, 곧 인격은 그대로 머문다.
바오로는 2014년 부활 아침 꿈속에서 육신과 영혼이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몸과 영과 지혜와 의식 전존재가 부활했다.’
그 후 꿈속에서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모습으로 늘 제 곁에 있었습니다.
3)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성경의 형상
☞ 자리를 마련하다 :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1-3)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당신께 데려가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 곁에 머물 것이다. 우리가 지상에서 그들과 나누었던 모든 것, 기쁨과 고통, 사랑과 아픔, 우리가 진지하게 나누었던 모든 대화, 우리가 느꼈던 친밀함 등 모든 것을 죽음을 통해 영원한 자리로 가지고 간다.
☞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리라 :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며 시간과 영원이 하나가 된다. 예수님과의 친교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영원 안에서 산다. “부활이 세상 마치는 날의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지금 일어나는 일이며, 누구나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이 생명이며 죽음을 초월하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오직 믿는 사람만이 실제로 산다. 믿는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 좀 더 깊이 보는 것,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이 모든 것의 뿌리임을 인식하는 것,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산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 의미 없이 연명하는 삶으로 외적으로는 활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제로 진실되이 믿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영원한 삶을 누린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죽음은 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다. 그가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 체험하는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산다. 죽음을 통해 우리 눈은 영원히 열릴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온 존재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참 생명을 체험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뜻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는 두 가지 형상
첫째 :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수호천사를 배정받는데, 이 천사는 일생 동안 우리와 동행하고, 죽음이 다가오면 죽음의 문턱을 넘어 하느님께 데려간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요한수난곡 다음의 합창으로 끝낸다.
"아, 주님 당신의 사랑스런 천사들을 보내시어
마지막 날에 제 영혼을 아브라함 품에 데려가게 하소서."
둘째 : 아브라함의 품에 대한 형상이다. 아브라함의 품은 유다인들에게 영예로운 자리였다. 가난한 사람은 영원한 잔치 가운데 아브라함 곁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 품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으로 데려가는 천사의 형상이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마태 8,11)
천사들이여, 이 교우를 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시고,
순교자들이여, 이 교우를 맞아들여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소서.
천사들의 합창대가 그를 받아들이고
옛적에 가련했던 라자로와 함께 그가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오른쪽 죄수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합당하게 죽는다고 뉘우치며 죄인임을 고백한다. 자신의 악행이 그런 형벌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선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놀라운 대답을 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낙원은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예수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나라다. 따라서 낙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곁에 있는 나라,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에워싸인 나라다.
☞ 열린 하늘 :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은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55) 죽으면서 스테파노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본다. 죽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길을 가셨고 우리가 모든 환난을 견뎌내고 당신 영광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셨다.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많은 환난을 겪을 것이다. 하늘은 끊임없이 경주하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영광이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입니다.”(묵시 3,5) 그리스도는 친히 승리한 사람을 당신이 아버지와 나누는 친교로 이끄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승리하는 사람에게 당신 어좌 가까이 앉도록 초대하며 당신과 깊은 친교를 나누리라는 것을 약속하신다.(묵시 3,21) 죽음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 사랑에 맡길 뿐 아니라 우리의 영을 선하신 예수님 손에 내맡긴다. 우리는 스테파노와 함께 주님께 우리 영혼을 받아주시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서원하는 내용은 죽음에서 완성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 나라, 하느님 영광의 자리인 낙원에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 천상 예루살렘 :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 2-5)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히브12,22-24)
☞ 만찬 ․ 잔치 ․ 혼인 잔치 : 구약성경은 구원 시대를 종종 잔치 형상으로 표현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는 깨어서 신랑이 오심을 기다리는 일을 이야기한다. 이는 죽음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오심을 말한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죽을 때 신랑으로서 혼인 잔치에 초대하시는 분임을 뜻한다. 우리가 자신과 하나 되고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과 하나 되며, 우리 생명의 근원이요 목적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을 상징한다. 영원한 생명은 모든 사람이 최상의 기쁨을 만끽하는 혼인 잔치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우리 모두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 우리의 온 존재, 곧 우리의 선한 모습뿐 아니라 악한 면까지도 초대받았다. 하늘나라에서 악은 우리를 하느님과 갈라놓지 못한다. 우리의 악한 모습은 하느님 사랑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런데 잔치의 비유는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을 통해 무너진다. 옷은 당시 유다인의 관념에 따르면 자신의 회개와 의로움의 실천으로 혼인 잔치에 합당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실존이다. 우리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잔치에 초대받았다. 하지만 회개를 필요로 한다. 악은 하느님에 의해 변화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초대에 응해야 하고 잔치 조건에 맞추면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 조건은 혼인 예복을 입는 일, 곧 우리 자신에 충실하고 우리가 입었던 의복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 주님과 함께 있는 것 :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리 1,21-23) 바오로는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산다. 그는 자신의 삶이 지금 이 순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에서는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갈망이 솟아오른다. 바오로의 깊은 갈망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리스도 곁에서 평온을 누리고 그 안에서 고향을 맛보는 것,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 안식처에 들어가다 :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에 동의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느님께 반항할 수 없으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좋았음을 느낀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가 뉘우치는 잘못과 나약함도 영원한 생명의 시각에서 볼 때 의미를 지닌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게 한다. 죽음은 마지막 결단이다. 실제로 하느님을 향해 결단을 내리는 내적 싸움이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더 이상 내적 동요를 느끼고 물음을 던지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영원한 고요가 아니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놀라운 생명이요, 우리를 잡아당기는 행복의 폭풍이다. 그러나 이는 미지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행복에로 점점 더 깊이 잡아당기는 행복의 폭풍이다.(게르하르트 로핑크)
2. 죽음 이후의 생명을 표현하기 위한 두 가지 형상
첫째 : 영원한 안식이다. 죽은 이가 하느님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좋았음을 하느님과 함께 고백하길 바란다. 그가 지금 죽음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 가운데 점점 더 하느님께 다가서기를 바란다. 그가 외적 장애를 받지 않고 사랑의 역동성에 빠져 하느님과 더 깊이 하나 되기를 바란다.
둘째 형상 : 죽은 이에게 비추어지기를 바라는 빛이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죽은 이는 자신의 생명을 깨달을 것이다. 죽은 이도 빛의 원천이 되기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빛의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죽음 이후에 자신의 온 생명을 바라본다. 우리는 죽은 이가 우리에게 주었고 또 지금 이 순간에 주고 있는 빛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빛과 사랑으로 완전히 사로잡히기를 기원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부패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 상태에서 평온에로의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음이라는 말을 듣고 슬퍼하기보다 그 복된 ‘건너감’에 따라 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암브로시오 주교의 죽음의 복됨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찬란한 모습
그들은 태양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면서 광선을 발산하고, 역시 빛나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묘사가 불가능하고, 이 세상에서 비교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운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과 몸과 머리가 장미꽃 색깔이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아름다운 나드 꽃으로 만든 관이 얹혀졌고, 그 머리카락은 물속에 뜬 무지개와 같았다. 그리고 각종 장식을 한 모습은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제2경전에서)
"나는 모든 성인들과 함께 광명의 나라에 들어갔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나는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것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하던 분을 하늘에서 만났도다." 나는 바오로도 성인이 되어 천국에서 무수히 많은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성인들은 인간이었고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성인이 되셨다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고백대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 지상의 전례에 참여하며 나그네로서 내가 걸어 나아가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천상 전례를 미리 맛보고 있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와 참다운 성막의 사제로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주님께서 영광의 찬미가를 부르며, 성인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면서 그들의 친교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으로 나타나시고 나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때까지 나는 그분을 기다린다.’(전례헌장8항)
남편 바오로는 나에게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확인시켜 준 스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의 사랑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3. 마침기도 :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저희 어머니인 천상 도읍 예루살렘을 보여 주시니, 거기서 저희 형제들은 이미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쓰고, 아버지를 영원히 기리고 있나이다. 나약한 저희도 성인들의 뒤를 따라 영광을 기뻐하며,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성인과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외치나이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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