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

2015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동정 학자 기념일(교회일치견학일)

기도하는 어머니 2015. 4. 30. 12:19

교회일치수업의 일환으로 오늘은 서울에 있는 명동대성당부터 구세군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파를 찾아 그들과 대화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시간으로 계획되었다. 아침에 미사를 다녀왔는데 미사시간부터 은총이 쏟아졌다. 나자로 마을 아침 7시 미사에 수원교구 내 수녀님들의 연수가 있어서 수녀님들이 성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녀님들을 뵙기만 해도 경건해지고 거룩해 보이고 많은 힘을 받는다. 정결, 청빈, 순명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주님께 한 생애를 바쳐 봉사하고 기도하며 헌신하는 모습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주임신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의 금싸라기 같은 말씀은 언제 들어도 힘과 용기를 주며 신앙생활에 큰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한다. 미사 후 집에 와서 서울에 나갈 준비를 하였다. 가는 곳마다 드려야 할 선물을 총무가 준비했는데 함께 운반하자는 문자가 왔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비가 내렸기에 우산까지 준비해서 범계역으로 갔다. 수리산역에서 출발하는 총무와 만나기 위해 6-3번 칸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열차가 도착했고 6-3칸에서 총무를 만나 이야기하다보니 어느 새 명동역에 도착하였다. 명동역에서 신 요한바오로, 김 안드레아 형제를 만났고 즐겁게 이야기하며 명동거리를 걸어서 성당에 10시 정각에 도착하였다. 손세실 수녀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인원파악을 하고 오늘의 일정을 이야기한 후 수녀님께서 먼저 명동대성당을 안내하였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이다.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명례방 종교집회에서 이다. 이후 1892년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하였으며, 1898년 5월 29일, 한국 교회의 주보인 무염시태의 마리아를 주보로 하여 대성당을 축성, 봉헌하였다. 1900년부터는 기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분들의 일부 유해를 받아 현재까지 지하성당에 모시고 있다. 1942년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 주교의 수품식이 거행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대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었다. 한국 초기의 벽돌조 성당이며 순수한 고딕양식 구조로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동성당은 그 건물 양식으로도 하나의 교회 사적 의미를 가진다. 대성전 건물 외관이 장식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 고딕 양식인 반면, 성당 내부에는 아치형 복도, 스테인드 그라스 등으로 공간의 미를 살렸다. 또한 곳곳의 제대, 성화, 성상 등 종교 예술품은 명동성당의 종교적‧ 미술적 가치를 더해주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교회사를 배우면서 익혔던 명례방 집회, 믿음의 성조 이벽과 이승훈의 초상화, 79위 복자품 등의 성화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 12사도 성화에 두 분 바오로와 바르나바 성인을 포함 열 네 명의 사도가 있다는 것과 명동대성당 공사 중 풍수지리설로 조선정부와 토지분쟁이 일어나자 블랑 주교는 건축의 주보성인 성 베네딕도에게 특별한 가호를 청원했고, 일이 잘 해결되어 성당이 건립되면 성 베네딕도의 제단을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명동대성당 완공 후 목조각의 성 베네딕도와 제단이 봉헌되었다는 것, 성당 정면의 다섯 개의 창으로 이루어진 제대 뒤편의 로사리오 십오현의도에서는 뾰족 아치형으로 된 창을 상 ‧ 중 ‧ 하 세 분분으로 나누어 타원형에 가까운 구획을 두고 모두 15개의 장면에 묵주기도의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 공방에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잠시 기도를 드린 후에 일행은 명동대성당 뒤편에 있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을 방문하였다.

블랑 주교님은 명동대성당을 세우기에 앞서 종현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는데 이 일을 전적으로 맡아줄 수녀들이 필요하여 프랑스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1888년 7월 22일 네 명의 수녀들이 제물포에 도착하여 사랑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젊은 수녀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수녀원의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첫 한국인 수녀 박황원사베리오 수녀님은 순교자의 후손으로 수녀가 되어 90세가 넘게 봉사하셨다고 한다. 단순과 겸손의 정신으로 기도생활, 형제적 공동체 생활, 애덕을 사명으로 사도직 생활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 그들의 인간적 ‧ 영적 품위를 높이며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확장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41개국에서 4천여 명의 수녀들이 사랑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수녀원 중에는 가장 역사가 깊고 수련자도 많다고 한다. 박물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한 후 다음 견학지로 향했다. 다음은 아현동에 위치한 한국 정교회인데 지하철 2호선 을지로 2가역에서 충무로역까지 가고 환승하여 5호선 애오개역 4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일행은 조별로 움직였다. 5호선 애오개역에서 내려 한국정교회에 도착하였다. 이미 점심 도시락이 와 있었다. 지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12시 40분부터 성당에 들어가 정교회사제로부터 정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말씀해주셨고 우리들의 그 많은 질문에도 답변을 척척해주었다.

정교회는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후에도 초기 교회의 전통을 지키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탕으로 정교의 진리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몇 번에 걸쳐 정통교회임을 주장하였다. 가톨릭과 가장 많이 닮았는데 예배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고, 연옥교리가 없고, 사제가 결혼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처럼 사제가 신자들을 마주보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신자들은 성소에서 기도를 하며 예배를 드린다. 성모공경과 성인공경하는 것도 닮았다. 질문에 주저함 없이 답변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지려면 다른 종교에 대하여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한국 성공회를 방문하는데 애오개역에서 충무로역을 거쳐 시청에서 내리도록 하였다.

정동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 도착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걸어다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뜨거운 햇빛보다는 걸어 다니기에 더 좋았다. 성당에 도착하여 수녀님이면서 한국최초의 여성사제분이 직접 우리를 수녀원 성당으로 인도하였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한국전통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조화시킨 성당으로 1978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성당 정면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상과 성스테파노, 성 사도요한, 성모 마리아, 성이사야, 성 니콜라스 등의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성공회도 16세기에 가톨릭에서 갈라져나갔지만 가톨릭의 전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성경은 73권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사제가 결혼할 수 있다는 것과 여성이 사제 수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 다음은 근접해 있는 배제학당역사박물관으로 갔다.

배제학당은 미국의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설립한 근대적 사학(私學)이다.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인재를 배양하는 ‘배재학당’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 학교 간판)을 내려 주었다. 교과목은 한문·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수공·성경 등이었는데, 영국인 비숍 여사는 1897년 배재학당의 규모와 교과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도덕적·지적 영향을 미쳐 왔고, 또한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는 기관은 배재학당이다. …… 이에는 한문 고전(古典)과 셰필드(Sheffield)의 만국역사(萬國歷史)를 가르치는 한문-국문과가 있고, 소규모의 신학과(神學科)와 독법(讀法)·문법·작문·철자법·역사·지리·수학 및 화학과 자연철학을 가르치는 영문과가 있다.” 이러한 교과목 외에도 배재학당에서는 체육시간에 서양식 운동인 야구·축구·정구·농구 등도 소개하였다. 또 특별활동 시간에는 연설회·토론회 등도 장려하였다. 그리고 배재학당에서는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福音)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에서나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학당훈(學堂訓)으로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운 것도 성경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6∼28절)라는 예수의 교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후 이 당훈은 배재의 정신이요, 교육의 목표이며, 실천이고, 또 생활이 되었다. 느낀 점은 한 사람의 깨어있는 정신과 열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는가?를 생각하였다. 당대의 유능한 인물들이 모두 배제학당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10월 9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하였으나,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하고 교회이름을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이라고 부르고 10월 9일 첫 예배를 보았다. 이 교회는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건물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신장 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고, 이곳을 통하여 김인식(金仁湜)·이흥렬(李興烈) 등의 음악가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다음은 구세군역사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구세군 역사박물관은 한국 구세군 선교초기부터 현대까지 구세군의 역사와 자료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사료박물관이다.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은 1865년 영국에서 윌리엄부스에 의하여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전도와 사회봉사를 중심으로 선교하는 국제적인 기독교의 한 교차로서 성서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고 또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이 채워주는 교회이다. 한국 구세군은 1908년 10월 1일 영국에서 허가두(Robert Hoggard) 선교사관이 서울에 도착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구세군역사박물관은 2002년 3월 5일 서울시 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고 구세군의 역사문화유산들을 수집, 보존, 정리 연구하여 구세군의 자긍심과 소속감,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이웃사랑을 실천한 100년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구세군 교회에 올라가서 사관으로부터 예배의 방식과 찬양대의 활발한 활동 등을 들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견학을 마치게 되었다.

오늘 견학에서 느낀 점은 신앙을 개척하기 위하여 애쓴 선조들의 피땀의 결과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는 점과 종파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마음이 열려지면서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명동대성당,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한국정교회, 한국성공회, 배제학당과 정동제일교회, 구세군교회 등 전교방식은 모두 다르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성경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준 신앙의 선조들의 노고와 열정을 보았으며 그 후손들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가? 그리고 다음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마음 깊이 고심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수녀님께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