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유고집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기도하는 어머니 2014. 2. 8. 12:36

2012년 9월 2일 루가복음 18장 :

이 복음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크게 구분하고 싶다.

첫 부분은 1절에서 8절까지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나머지 43절까지로 나누어 본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다. 유사한 복음을 우리는 공관복음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다.(찾아보고 정리한다.)

오늘은 그 다음 부분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묵상한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9절~14절), 어린이를 사랑하시다.(15절~17절), 하느님 나라와 부자(18절에서 27절), 따름과 보상(28절에서 30절),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 예고하시다.(31절에서 34절),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35절에서 43절).

이 부분도 더 세분하여 둘로 나누면 9절에서 30절, 그리고 31절에서 43절 부분으로 나누어 묵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개관하기 위하여 뒷부분 전체를 읽어 보자.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 주님을 향하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말씀하신다. 어느 부분하나 모자람 없이 하느님 계명에 충실한 바리사이, 지식인이고, 사회 교회 지도층이며, 부족할 것이 없다.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뽐내는 것은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 하느님께 순명하고, 하느님께 인정받는 것을 지상의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진실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자신은 하느님을 흠숭하는데 흠 잡힐 것 없는 완벽한 신앙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도 당연히 자신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자랑스럽고, 언제나 존경받는다. 반면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지 조차 못하고 멀찍이 서서 하느님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가슴을 치며, "오 ,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가 당신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당신께 드리는 이 마음은 찢어지고, 깨어지고, 비참하고, 죄로

가득 찬 마음, 양심의 가책 때문에 당신을 품지도 못하는 마음뿐 이오나, 주님 저는 당신의 자비를 구합니다. 영원하신 사랑이며 자비이신 당신께 의지할 뿐이오니,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의롭게 된 이는 세리이다.

그는 하느님의 구원을 받았다.

그가 평소에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가 계명을 잘 지켜서가 아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서가 아니다.

그가 양심이 명백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자기 욕심을 채우지 아니해서가 아니다.

그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해서가 아니다.

그는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자기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가 아니라, 우리가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어린이의 단순성과 겸손, 힘없음, 무조건적인 의지,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적인 따름, 착함, 순명, 연약함,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에 용납되는 우리가 가져야할 특성이라는 말씀이다. 겸손한자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이 다른 표현이다.

하느님 나라와 부자의 비유에서 신앙인으로서 나 자신을 바라본다.

선하신 예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을 묵상해 보자.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하느님만이 선함의 근원이심을 선포하신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이심을 선포하신다. 또한 당신이 겸손하심처럼 우리도 겸손해야함을 말씀하신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는가? 하느님이 선하시니 내가 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나를 스승으로 말하는 이여! 당신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계명으로 선한 사람이 되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다." 그렇게 말씀하시고(이 말이 너무 어려우므로 다시 설명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다시 권고하신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자랑스럽게 "저는 모든 그런 계명을 충실히(어려서부터) 지켜왔습니다." 그는 내가 이렇게 하였으니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부족함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자기의 부족함은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한 행동의 자랑스러움만 과시하고 있다.

그러자 주님은 "그중에 하나가 부족하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 생각해보자. 나는 이 세상의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켰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정의롭고, 자비로우며 올바른 사람이고, 다정한 사람이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신앙인이다. 교회활동에 적극적이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정말로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누구나 호기심이 없을 수도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에게는 하늘나라에 보물을 보증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런 후에야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나와 함께 머물라. 그러면 너는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부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왜 슬퍼하면서 떠나갔을까? 모든 계명을 잘 지키는 독실한 신앙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간이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에도 순서가 있을까?

인간이 집착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원초적인 욕구충족의 수단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색욕, 식욕, 권력, 명예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윤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다른 요구나 의무에 대한 그것보다 훨씬 치열하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부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원초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 다른 사람보다 강할 수 있다. 예수님이 미래에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고 하여도, 현실적인 부에 집착이 강한 그 부자는 이루어 놓은 것을 흩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는 그 집착이 너무 강했다. 부를 포기하기에는 신앙심이 너무 나약했다. 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유혹이 너무 강력했을까? 그래서 그는 울면서 떠나갔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쉬워하는 눈물,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느끼는 가슴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으로 흘리는 눈물.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다음 대목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과연 하느님은 우리가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가.

현실에서 부자는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인가?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자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보려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와는 정녕 상관없는가?

마음이 깨끗한 부자도 있고, 자선을 많이 하는 고마운 부자들도 있지 않는가?

부자들의 자선을 강조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유지하나?

헌금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틀린 것인가?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다.

부자가 혼자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을 통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님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구원은 "낙타가 바늘귀를 건너는 것" 만큼 어렵고, 지난한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것 아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은총을 입으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부자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라도 그가 부자이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누구든 예수님의 은총을 덧입으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단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다. 아마도 겸손함이 그 자비를 입을 수 있는 근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부자가 가지고 있는 부를 모두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와 마음이 가난한 세리가 하느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통회하는 모습에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이어서 28절에서 30절에서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현실적인 반응을 기사로 하고 있다. 당신을 따르려고 우리 제자들은 가진 것을 전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부자처럼, 당신을 따르기 위하여 가진 것을 모두 버린 제자자신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버린 것 이상으로 현세에서의 되받으며,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다. 예수님의 약속은 영원하고 제자들의 희생은 현세적이다. 하느님의 영원한 은총에 힘입지 않고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수난을 앞둔 예수님이 바라보는 전망!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뒤에 오는 부활과 제자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당할 고난과 구원도 당신 은총의 비젼 안에서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더 확실해질 것을 당신이 아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당신께 순명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은 한없이 안타깝고 귀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의 겸손과 순명이, 그들이 벗됨이 너무나 반갑고, 이쁘다.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한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의 영원한 보증이 되어 주신다.

그리고 예리고 성에 가까이 이르렀다. 이제 마지막 주일.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구원이 지나감을 알아차리고 외친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어,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눈먼 이가 원하는 자비는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런데 눈먼 이는 누구인가? 눈은 무엇인가.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으로 모든 정보가 들어온다. 눈은 은총이 들어오는 길이다. 눈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창이다. 눈을 통하여 구원이 오는 것을 본다. 그래서 눈먼 이는 눈뜨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이 오는 것을 보기 위하여 그 시점 그 거리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눈멀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구원자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 속에 얼마나 귀중한 순간인가? 천지가 창조되는 순간보다 더 귀하지 않은가? 우리 중에 이런 귀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 순간 그 거리에 예수님과 지척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보다 더 축복받은 이가 또 있던가?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예수님, 구원자여, 저를 구하여 주소서, 저를 당신 것으로 알아주소서. 영원한 생명으로 저를 가득 채워 주소서. 영원한 생명의 책에 저를 기록해 주소서." 그리고 그는 구원되었다. 영원한 생명의 책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이 세상이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말씀이 전해지는 한 그의 이름은 영원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자비가 그를 구원하였다.

이 기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영적인 울림이 있는 것이다. 이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제자들을 알아듣지 못한다. 영적으로 아직도 멀었다. 아쉽고 안타깝다. 그래서 눈먼 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주님이다. 너희가 믿고 따르는 이가 이제 마지막 순간에 가까이 가고 있는데 너희는 정녕 그것을 그렇게 듣고도 염두에 두지 않는가? 영적인 눈을 떠라. 나를 믿는 자들아 내 백성아 나를 바라보라. 이 순간, 바로 내가 너를 부르는 영적인 소리를 들어라. 귀 기울여라. 들리지 않은가? 가슴에 손을 얹어보아라. 가슴이 뛰지 않는가? 무엇에 그렇게 정신이 빠져 있는가? 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내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가? 나에게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정녕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내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