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유고집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기도하는 어머니 2014. 2. 8. 12:34

2012년7월10일 루가 복음 7,18:23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전하였다. 그러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를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당신이 저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십니까?”

이제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혹이면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십중팔구는 그럴 것입니다. 이제 와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한 체 몸과 마음이 약할 대로 약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조급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기 전에 이 백성이 회개하여, 하느님 나라를 찾게 될 희망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의 길을 예비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자각하고, 애를 쓰며 그 일을 수행하여 왔다고 자부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얼마나 찼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요한입니다.

옥에 갇혀 있어도 소식은 들립니다. 천둥처럼 예수님의 소식이 들립니다. 어린 백성을 보살피는 예수의 활동을 눈으로 보듯 들립니다.

감옥이지만 고요한 새벽녘 묵상에 잠길 때,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으시던 예수 모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면 요한의 큰 눈에 눈물이 어립니다.

맑고 푸른 연민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던 예수가 떠오릅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터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매어 드릴 자격조차도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제가 어찌..” “지금은 요한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주시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시다.” 그 때 그 눈빛, 그을린 얼굴 모습, 인자하게 권유하던 그 손짓, 세례를 받으려고 강물에 뛰어 들던 그 모습, 물속에서 솟아오를 때 그 거룩한 모습, 성령의 비둘기로 당신 위에 내릴 때 그 사랑스럽던 모습, 요르단 강 둑을 나설 때 그 표표한 모습, 다른 사람으로 다시 나신 그 영명함이 언제나 요한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 때 요한은 알았습니다.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옥에 갇혀 곰곰이 생각다 보니, 요한은 다신 한번 그 모습이 그립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옥에 있고, 나의 나라는 점점 작아지고, 당신의 나라는 점점 커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면서도, 인간인지라 더 확인하고 싶고, 더 확신하고 싶고, 더 아쉽고, 죽음이 코앞인 것 같은데.

‘그래 내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보자. 그리고 정말로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다시 확인시켜 보자. 어린 제자들의 질문이니 자비하신 그분의 응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냈다면, 내 친척인 예수가 잘 보아주지 않으랴?’

그 때 예수님은 온갖 시름에 잠겨있는 백성들을 고쳐 주시느라고 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연민이 터졌습니다.

“요한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 그리고 판단은 그가 하게 하여라. 내가 메시아인지, 너희가 기다리던 이인지는 너희가 판단할 일이다.

나로 하여

눈 먼 이가 본다.

눈 먼 이가 질병의 속박에서 벋어난다.

눈 먼 이가 편견의 속박에서 벋어난다.

눈 먼 이가 가난의 속박에서 벋어난다.

눈 먼 이가 영혼의 속박에서 벋어난다.

육으로 먼 눈 이 새로운 광명을 본다. 새로운 관계를 보고, 관계를 맺는다. 새로운 인생이 된다. 그리고 영으로 눈 먼 이가 영을 본다. 스스로의 편견에서 벗어난다. 스스로의 아집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밝은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내가 그 세상을 그들에게 주었다.

다리 저는 이가 제대로 걷는다.

다리 저는 이가 보는 세상은 비뚤어 졌으나 이제 바로 선다.

세상이 그들을 비뚤어지게 보았으나 이제 바로 보기 시작했다.

다리 저는 이가 사는 영의 세계는 기웃해져 있었다.

이제 그들의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되었다. 세상의 차별에서, 세상의 멸시에서. 세상을 원망함에서 해방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그 세상을 주었다.

나병환자들은 깨끗하여 졌다.

기록된 죄의 결과 가장 참혹한 차별을 이제 내가 해방시켜 주었다.

스스로 잘못 없이, 스스로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는 채, 사회에서 제외되어 죄인으로 살아온, 몸과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그들을 누가 위로하며 손잡아 주었나? 가족인들 그리하며 부모자식 친척인들 그럴 수 있는가? 그들은 바로 소외의 본래 의미요, 차별과 냉대의 그 대상이라. 누가 그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을까?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면, 예수님의 연민이 아니면 누가 그들을 위로 할 수 있는가? 내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주었다.

귀먹은 이들이 듣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가 먼 이들이 드디어 복음을 듣기 시작하였다. 영의 귀가 먹은 이들이 모두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던 이들이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준 세상이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 영으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 하느님께 죽었던 이들이 회개하고 되살아난다. 행복에 죽었던 이들이 이제 행복에 기꺼워 되살아난다. 강철같이 굳었던 그들의 마음이 봄눈 녹듯 되살아난다. 정녕 희망에 죽었던 이들이 되살아난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준 세상이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하느님 말씀에 가난한 이들

하느님 영에 가난한 이들

하느님 위로에 가난한 이들

이 세상 부귀영화에 가난한 이들

자부심에 가난한 이들

의지할 곳 없어 가난한 이들

동정심 없어 가난한 이들

고아나 과부와 같이 모든 것에 가난한 이들

그들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을 듣는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눈멀고, 귀멀고, 사대육신이 부족하며, 병 걸리고, 죽어 있던 영혼들이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본다. 새로운 행복을 받아들인다. 기꺼움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감격에 날뛰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 세상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다.

“요한이여, 선도자여, 세례자여, 나의 친척이여, 나의 친구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 여자 몸에서 난이 중에 당신보다 더 귀한 이는 없소.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 보다 더하다오.

당신이 찾는 행복은 나에게서 나온다오.

나는 하느님에게서 났소.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창조 때에 하느님과 함께 있던 나요.

나는 그러므로 당신을 당신 어머니 태에서 지을 때부터 알았소.

당신의 소명을 내가 알고 있으며

당신의 일을 내가 알고 있으며

당신의 생명을 내가 알고 있소.

요한이여, 사랑하는 이여.

모든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오.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요.

나는 가난한 자요.

나는 행복한 자요.

나는 사랑하는 자요.

행복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라오.

행복은 나를 인식하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의심 없이 믿는 것이라오.

모든 행복의 근원은 나 예수로 부터라오.

사랑하는 요한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