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줍는 여인
“우리가 지금 받는 이 고통이 후일 어떤 꽃을 피우게 될지 어찌 아오?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일이오. 부디 믿고 살아 주시오.”(추기경님의 할아버지 : 옥문을 나서는 아내에게)
“그렇지요. 세상 만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것이지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꽃인들 피울음으로 안 비칠까……. 그러나 아낙 얼굴을 보니 공덕을 쌓아야 할 분이오. 좋은 씨가 뿌려져 있으니 좋은 거름이 있어야겠어요. 누가 아오? 지금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공덕이 될지…….”(추기경님의 할머니에게 : 잠시 동행하던 스님이 하는 말)
‘이 설움 들풀들이나 알까, 산풀들이나 알까, 아무도 모르오. 아무도 모르오…….’
‘그래, 세상의 행복이란 별것인 것 같지만 별것이 아니다. 저렇듯 저녁밥 짓고, 밖에 나간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고, 걱정 없이 잠들면서 하늘에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알겠니?’
‘나를 옥 밖으로 껴내 주신 뜻을 이제야 어슴푸레 알 것 같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겠어요. 동냥질을 해서라도 옥바라지를 할 것이며, 이 어린 생명을 어질게 거두겠어요.’
(추기경님의 할머니의 혼잣말)
“오늘부터 우리 보리 이삭을 주우러 다니자.”
“아니, 마님이 보리 이삭을 주워요?”
“시끄럽다. 지금 옥에서는 배가 고파 지푸라기를 씹고 흙벽을 뜯어 먹는 판이야. 어서 나서자. 보리 이삭을 주어서 주먹밥이라도 지어 들여보내야 돼.”
“나는 새삼스럽게 보리 한 모가지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한 이삭에서 서른 알의 보리가 나온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흘려버린 이삭이 뜻밖의 덕이 된다는 것도 배웠다.”
“마님은 옥에서 나오시더니 전혀 다른 분이 되신 것 같아요.”
“나도 다시 태어난 것 같다. 하늘도 새롭게 보이고 땅도 새롭게 보이고 풀도 나무도 다 새롭게 보인다. 이제야 이 세상의 이 모든 것들이 왜 있는지를 안다.”
“왜 있어요, 마님?”
“서로를 위해 주기 위해서다.”
“참 고맙게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주는구나. 나도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바람이 되어야 할 텐데…….”
“사람이 선하자면 하늘의 천사 못지않지만 악하자면 짐승보다도 더하단다.”
(딸에게 들려주는 말)
여인은 부풀어 올라 있는 아랫배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래, 아가야. 내 비록 이 얼음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너는 저처럼 맑음 속에 있어 다오. 그리하여 네 세상에는 제발이지 봄이 와서 물 위로도 한번 뛰어 보는 세상살이이기를 바란다.’
이날 밤, 여인은 하늘의 별들이 내려다보는 그 움막 짚단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인 김영석(광산 김씨)이며, 이 여인은 추기경의 할머니 강말손(진주 강씨)이다.
이름 없는 별들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있다. 맑게 갠 하늘에서 생각지도 않은 벼락이 친다는 말인데 우리 처지가 정말 그러하였다. 하루아침에 묶인 몸이 되어 칼을 쓰고 고문을 받는 험한 옥살이를 생각해 보아라 …….”
“어머니, 하늘의 별이 더 많아 보여요.”
“정말 그렇구나……. 저 하늘의 별처럼 이름 없는 분들이 너무도 많이 돌아가셨다. 망나니를 시켜서 목을 베는 일도 귀찮아 들보 두 개를 포개서 만든 것으로 위에 있는 들보가 밑에 있는 들보 위로 떨어지게 해서 한꺼번에 스무 명 정도의 목을 으스러뜨려 죽이곤 했지. 구덩이를 파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포개어 넣고 그 위에 흙과 돌을 쌓아 매장하기도 하였고.”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속이 깊으신 분이었어. 빈말이 없으시고 인정이 많으셨고.”
“그러나 너의 아버지는 눈 감으면 더 넓은 세상이 보인다고 하셨다.”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지 천주님의 세상이 아니다. 천주님의 세상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는 육신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떠서 천주님의 세상을 보신 것이야.”
“그래, 너희 아버지는 저 하늘의 별로 앉아 계실 것이다. 아니, 너희 아버지뿐만이 아니고 천주님을 바라고 죽은 분들은 모두 별이 되었을 것이다.”
“왕대라는 뜻이 무엇인지……?”
“마음이 왕대처럼 열려 있고, 곧고, 푸르고, 듬직한 것이겠지요. 어때요? 내가 주선할 테니 선을 보지 않겠어요?”
“저는 가진 것이 너무 없습니다. 재산도 없고, 양친도 계시지 않고 나이도 많고 …….”
“무슨 말을 그리합니까? 순교자의 피 하나로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어려서부터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사람 됨됨이를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말고 처녀를 보기나 하십시오.”(서른한 살 김영석과 열입곱 살 서중화의 혼인)
세월은 흘러 장녀 명례, 차녀 명영, 장남 달수, 차남 필수, 동한, 마침내 1922년 5월 8일(음력) 산모는 아들을 낳았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쉰다섯, 어머니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이 아들이 수환, 곧 추기경이다.
노을 지는 언덕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기침을 자주 하였고, 병석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어머니가 붕어빵 장사를 하고 행상을 하며 자녀들을 키웠다. 순하디 순한 순한이~~ 어머니를 좋아하고 하늘을 좋아하는 순한 아이로 동한이 형과 함께 놀이하며 어린 시절을 지냈다.
“넌 왜 엄마를 한사코 따라다니려고 하니?”
“엄마가 좋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고개 너머를 다녀 볼 수 있으니까.”
“고개 너머를 다녀 보는 것이 좋으니?”
“응, 엄마. 나는 늘 궁금하고 가 보고 싶어. 고개 너머에 누가 사는지.”
“고개 너머. 고개 너머에 누가 사는지……. 그래, 그렇다면 나랑 함께 다녀 보자. 누가 사는지…….”
“아버지, 주권이 뭐예요?”
“나라를 움직이는 권한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빼앗겼어요?”
“우리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왜 힘이 없었어요, 아버지?”
“그것은 차차로 알게 될 거야. 네가 좀 더 크면……, 쿨룩쿨룩…….”
막내는 순간 참새가 날아와서 오른쪽 이마 위를 스치는 것 같았다. 아찔한 느낌이 일면서 땅 위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형의 비명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앗! 우리 수환이 머리에 돌 맞았다. 저 비겁한 일본 놈을 잡아! 수환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수환아!”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막내는 혼자 있을 적이 많았다. 어머니는 행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옹기 가마로 가고, 형마저 학교로 가고 나면 적적하게 지내야 했다. 수탉이 홰를 치고 울면 수탉 흉내를 냈다. 공중 높이 떠 있는 소리개 흉내를 팔을 벌리고 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신작로를 내다보았다. 어머니가 오나, 형이 오나 하고.
조카의 젖을 나눠 먹어 컸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카와 한 판 붙었다. 끝내 수환이가 이겼다.
“왜 울어?”
“…….”
“이겼으면서 왜 우느냐니까?”
그제야 막내가 고개를 들었다. 막내는 부은 눈을 껌뻑 거리면서 말했다.
“이긴 것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
“무슨 소리야? 이기면 좋고 지면 슬픈 건데…….”
“아니야, 이겨도 슬픈걸.”
“바보”
“바보?”
“그래, 바보가 아니고 뭐야, 이기고도 울다니.”
“바보래도 좋아. 난 이제는 다신 안 싸울래.”
“정말이야?”
“정말이야.”
두 아이는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상대편의 옷을 털어 주었다. 두 아이는 이내 언제 싸웠느냐는 듯 어깨동무를 하고서 언덕길을 내려 왔다.
저만큼 떨어져 있는 논두렁의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백로가 훨훨 날아서 한 바퀴 맴을 돌고는 다시 소나무 가지에 앉았다.
“어머니, 나는 가게 주인이 되고 싶어요.”
“어머니, 가게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
“가게가 없으니까 머리에 이고서 팔러 다니지 않는가요? 내가 가게 주인이 되면 돈을 벌어서…….”
“돈을 벌어서 뭐 할 건데?”
“어머니께 인삼을 사 드리겠어요.”
어머니는 힘든 행상을 하면서도 늦은 밤까지 기도를 드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어머니, 이제는 알았어요. 우리 고향은 저 산 너머 하늘 나라예요.”
신부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방을 도배하고 청소를 하고 난 후 마루에 앉았을 때 앞산 허리에 둥근달이 떠올랐다. 어린 형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흙이 참 좋다
선생님이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막내는
“저는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려고 공부합니다.”
선생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려고? 네가 생각한 것이냐? 아니면 누가 그렇게 말하더냐?”
“제가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그럼?”
“신부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조용히 해! 자, 나는 수환이 네 생각이 듣고 싶다. 너는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느냐?”
“저는 주권을 찾고 싶습니다.”
“선산에 살 때였어요. 일본 아이들하고 싸움이 벌어진 자리에 있었어요. 여기 제 이마 위 흉터를 보세요. 이 흉터는 일본 아이가 비겁하게 돌을 던져서 맞아 생긴 것이에요…….”
“어머니,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지요?”
“죽는다는 것은 별것 아니다. 몸은 이쪽에다 버려두고 영혼은 저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쪽은 어디이고 저쪽은 어디예요?”
“저쪽은 하늘나라이고 이쪽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알겠니?”
“그런데 왜 하늘나라로 갈 때 몸은 버려두고 가지요? 그냥 이 몸으로 걸어가면 좋을 텐데.”
“몸은 이 땅에 올 때 받은 것이니 갈 때는 돌려줘야 하는 거야.”
“어머니, 그럼 우리는 이 세상에 잠깐씩 다녀가는 것인가요?”
“그렇지, 지금 우리가 장에 왔다 가는 것처럼.”
막내는 돌을 버리고 생각했다. 이 세상살이는 저 장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왁자한 세상, 번거로운 세상, 속이고 속기도 하는 세상. 싸움을 하기도, 화해하기도 하는 세상. 때로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세상. 아아, 아버지는 마침내 이 장터 같은 세상을 둘러보고 나서 조용히 돌아가시려는 것일까.
“어머니, 하늘나라는 멀어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지.”
“왜 그럴까요?”
“우리 동네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길을 아는 사람에게는 가까울 것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멀 것이고.”
이날로부터 이틀 후, 섣달 그믐해가 질 무렵 막내네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이 세상에 와서 예순 해 동안 떠돌다가 마친 한 삶이었다. 누나들과 형들은 크게 슬러하며 울었으나 막내는 오래 울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해 준 대로 아버지의 죽음은 몸은 땅으로 돌려주고 영혼은 저 세상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막내네 아버지의 상여는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가리미 공동묘지 산으로 갔다.
마을 어른들이 땅을 파자 곁에서 흙을 한 줌 집어 든 막내가 살며시 바로 위 동한 형한테로 와서 말했다.
“형아, 흙이 참 좋다.”
빈자리
그렇지 않아도 말이 적은 막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더욱 말이 줄었다. 긴장하고 있을 때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뚱한 표정이었고, 웃을 때는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동무들하고 왁자하게 떼 지어 떠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한둘이 그림자 밟기나 하며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어떠냐?”“허전해요. 기침하고 누워 계실 때는 몰랐는데……, 막상 계시지 않으니까 기침 소리도 그리워요. 그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아랫목 빈자리가 넓어 보여요.”
“그래, 사람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바람 소리도 더 크게 들리는 것이란다.”
“맞다. 후레자식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없어서 버릇없이 막되게 자란다고 해서 하는 욕소리다. 나는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너희들 먹여 살리는 것보다도 어떻게 하면 그런 욕을 듣지 않게 할까 그게 더 큰 걱정거리다.”
“어머니! 절대, 절대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겠습니다. 공부도 아버지가 계실 때보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머니, 제 탓이에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내가 아니라는 말에 그만 아이들과 함께 참외 서리를 하고 말았어요.……, 공부도 저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나 지금이나 그저 그래요.”
“막내는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보아라. 그리고 내 말을 잘 들어라. 너희 아버지는 이치에 맞는 말씀을 잘 하셨다. 언젠가 나한테는 자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부모란 하느님의 자식을 이 땅에 사는 동안만 맡아 기르는 책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에 들게 키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키워야 한다고 했지.”
막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형이 깜짝 놀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의 후레자식이 안 되겠어요.”
“그래, 우리 막내가 참 고마운 대답을 해 주었다. 하느님의 후레자식이 안 되겠다는 다짐만으로도 나는 성모님께 얼굴을 들 수 있게 되었구나. 자, 떡을 마저 먹어라.”
“그래, 마리아 할머니네 외아드님이 사제 서품을 받는 대구 성당에를 나도 가 보았지. 세상에 장엄하다는 말이 있다는데 바로 그런 미사를 보고 하는 말이더구나.”
“선운사 어떤 스님은 한 자식이 출가하면 아홉 가족이 모두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을 듣고 스님이 되었다 하더구나.”
형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머니, 그러면 신부가 되는 것도 효도하는 길이군요.”
“그렇고말고, 부모한테 효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께 효도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겠느냐?”
형이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두 주먹을 꽉 쥐고서 말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바라시는 대로 하겠어요.”
“수환이는?”
“어머니, 저는 아직…….”
“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냐?”
“어머니, 하느님께서 우리들 가슴마다에 씨를 뿌렸다구요?”
“무슨 씨를 뿌려요? 우리들 마음은 밭도 아닌데?”
“아니다, 너희 아버지는 심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한문을 잘 모른다만, 그러나 마음 심(心), 밭 전(田) 자 정도는 안다.”
이번에는 형의 눈이 또록또록 빛났다.
“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가슴속에는 마음 밭이 있다는 거죠?”
“그렇고말고, 거기에 하느님께서 씨앗을 묻어 주신 거야. 장사꾼이 될 사람은 장사 씨앗을, 기술자가 될 사람은 기술 씨앗을, 군인이 될 사람은 군인 씨앗을, 그리고 신부될 사람한테는 신품 씨앗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씨앗이 묵혀져 버리면 어떡하지요?”
“물론 사람이 잘 알지 못해서 개중에는 하느님이 심어 놓은 종자를 썩혀 버리는 사람도 있지. 아마 자기가 하는 일에 신이 나지 않고 실패가 많은 사람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그럼 나와 형 마음 밭에는 신품 씨앗이 떨어져 있는가요?”
“글쎄다, 아직은 모르지. 장사꾼 씨앗인지, 옹기장이 씨앗인지……, 아무튼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안 되고 싶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 속에는 빈터가 있어.” “응, 바람이나 그냥 비잉 돌고 갈 뿐 아무것도 없는 빈터 말이야.” “네 그 빈 터에 주님이 오실지도 모르지…….” 형제는 이내 잠들었고 별들만 대화를
멀고도 먼 길
막내는 산속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잎이 지고 없는 나무 사이에 펑퍼짐한 바위가 있었다. 막내는 그 바위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서 기도를 했다.
“하느님, 하느님께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저한테는 하느님밖에 달리 부탁드릴 데가 없습니다. 오늘 이 성적표(막내의 성적표는 거의 을 위에 붓뚜껑이 눌려 있었다)를 가지고 가면 어머니께서 크게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 어머님이 실망하지 않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후레자식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다만 어머님을 실망시키는 아들도 되지 않겠습니다. 이 두 가지 약속을 반드시 지킬 터이니 하느님께서 우리 어머니한테 말지나야, 스테파노 너무 꾸중하지 말아라, 이렇게 귓속말 좀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수환아, 밥을 굶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굶어서는 안 된다.”
“이 에미의 소망이 무언 줄 아느냐?”
“어머니의 소망이 무엇인데요?”
“동한이와 너가 신부가 돼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행상 다니는 것이 어린 너희 형제한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한테는 슬픔 보퉁이이기도 하다. 한 여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몸에 비단옷 걸친 남들을 볼 때 어찌 부럽지 않겠느냐. 그리고 남의 집 개를 짖게 하고 물건 하나 팔아 달라고 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어찌 내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겠느냐. 남의 집 처마에서 하염없이 소낙비를 피할 때도 슬퍼지고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할 때는 더욱 배가 고파 오지.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약해지려 할 때마다 너희 할머니를 생각하곤 했었단다. 나의 이런 서러운 고통쯤이야 너희 할머니에 비하면 지푸라기 한 낱 같은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너희 형제 떠올리면 힘이 불끈 솟는 것이야. 내한테는 쌀 곳간의 열쇠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자랑스러운 하느님이 좋아하는 아들이 있노라고. 그런데 이 철없는 녀석아, 네 지금 그 꼴이 무엇이냐.”
“아무튼 도 닦는 일은 이 세상 일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할아버지, 저는 도 닦으려는 것이 아니예요. 어머니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라 했어요.”
“어이 사람을 낚는고?”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오게요.”
“그으래? 그렇다믄 그 낚시에 끼우는 미끼는 무엇인고?”
“하느님의 말씀이어요.”
“하느님의 말씀이라……, 그럴듯한 미끼로구나.”
노인은 땅에다 작대기로 “天網이 恢恢(회회)하여 疎而不漏(소이불루)니라, 곧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기어도 새지를 않는다, 이 말 아닌고?”
“너는 이런 팍팍한 황톳길을 많이 걸어 다니도록 하여라.”
“왜요, 할아버지?”
“사람을 낚고자 한다고 했지 않느냐? 그리고 황톳길에서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줄 줄 알아야 하고.”
“그러나 이 길에서 너 혼자만 낚시대를 들었다고 생각 하지 마라. 돈을 미끼로 삼은 낚싯대, 감투를 미끼로 삼은 낚싯대, 색정을 미끼로 삼은 낚싯대가 너를 노릴 수도 있어. 조심해야 돼.”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노인은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음의 그림자
1933년. 이때의 엄동은 정말 설한이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새벽 5시면 일어냐 했는데 마당 끝에 떠놓은 세숫물이 금방금방 얼어붙을 정도였다. 특히나 나는 정든 얼굴들, 정든 산천의 시골에서 낯설고 물 선 도회지로 막 옮겨 온 데다 어머니 품안을 벗어나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함께 추웠다.
군위 용대동의 우리 마을 앞길에서 보는 서녘 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산굽이를 아스라이 돌아가는 신작로 양편에는 키 큰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거기에 가을 단풍이 들어 버드나무 잎들이 노오랗게 하늘거리던 풍경하며 건너 먼 산 및 마을에 노을이 들면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초가지붕 위로 솔솔 피어나고 있던 풍경하며.
그것은 내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화폭이다. 그런데 나는 그 풍경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 마음 빈 곳이 채워지고 동심으로 마음껏 뒹굴 수 있는 초원의 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나와 본 도회지는 황량하기만 했다. 거리의 바람도, 사람들의 정도 메마르게만 느껴졌다. 이미 어머니까지도 군위의 용대동 집을 정리해서 대구로 나오고 말았는데 나는 그 용대동 우리 초가집에 살던 때가 그리웠다.
몇 번이나 빨아서 딱딱하게 구겨진 1원짜리 동전 앞에서
“뭐가 나빠? 여기는 재미없는 학교야. 맨 날 기도하고, 침묵하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침묵하고, 공부하고, 정말 지겹지 않니? 규칙도 숨 막힐 듯이 엄격해서 잘못하면 소금에 밥을 먹어야하고.”
그러나 다른 한쪽은 침묵이었다. 한쪽만이 계속 떠들어 대었다.
“집에 있던 날을 생각해 봐. 동무들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지, 기도 적당히 해도 되지, 엄마가 맛있는 음식 해 주지, 무엇보다도 엄마하고 함께 잘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자, 이렇게 하자고. 이 1원짜리를 일부러 보이는 자리에 두어서 들키게 하는 거야. 그러면 이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가게 돼.”
“무얼 망설이고 있어. 자, 어서 해 보라니까.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작정하고 신부님에게 들키기를 바랐으나)
나는 이날 밤에 나의 퇴교 음모에 빌미가 되어 주길 바란 1원짜리 동전을 멀리 학교 담장 밖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가거라. 이 가치 없는 것아.”
그렇다고 나를 바깥 세계로 끌어내 보려고 하는 작은 악마의 유혹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늘 마음 한쪽 귀퉁이에 웅크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의지가 또 한번 안개결처럼 허물어진다고 판단되었을 때 결정적으로 음흉한 음모를 꾸몄다.
서울동성학교 을조(갑조는 상업학교, 을조는 신부코스)에 입학하여 2학년이 되었을 때,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나서 학교로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왔는데도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나의 한쪽이 또다시 꿈틀거리며 나를 부추겨 대었다.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싫지 않나? 싫지? 그래, 머리 아플 거야. 기회는 이때야. 돌아가지 말라구. 도망가, 도망가자니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선과 악의 싸움은 언제나 영혼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와중에 공벨 신부님을 찾아갔다.
“신부님, 저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갑자기 그러나?”
“오늘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제가 바로 울을 넘어온 도적이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네가 그런 생각을 하나?”
“저는 제가 신부 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야. 어서 나가.”
“어디서 나가란 말입니까?”
“이 방에서 나가! 그러나 학교 문 앞에서는 기도해.”
하얀 달밤의 박꽃
나는 한국 사람이다.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고 된장국과 김치를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사랑하며 달밤을 아끼는 한국 사람이다. 초가지붕에 빨갛게 고추 널려 있는 것만 보아도, 고요한 저녁에 달그닥거리는 설거지 그릇 소리만 들려도 그리운 어머니가 떠오르는 평범한 한국 사람이다.
나는 김광섭 시인이 1947년에 발표한 <나의 사랑하는 나라>라는 시를 기억하고 있다.
지상에 내가 사랑하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쳐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데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의 꿈이어니
형 동한과 북한산에 올랐던 그날
‘형, 하얀 달밤 초가지붕에 피어난 박꽃을 본 적이 있지?’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관이 아름다운 것도 아닌 꽃, 누구 보아 달라고 피는 꽃은 더욱 아니지. 그저 달이나 뜨면 배시시 수줍은 미소나 짓는 듯한 꽃. 그 슬픔을 지닌 듯한 박꽃을 나는 언제부터인지 오늘의 처지에 놓인 우리 민족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해. 저렇게 하얗게 야위다가 박도 맺지 못하고 져 버리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에 오늘 밤도 가슴이 메어. 형. 박꽃은 지글거리는 저 태양의 횡포를 언제나 벗어나게 될까. 하늘에는 또 먹구름이 가득하여 폭풍우가 올 것도 같은데…….’
※ 태양의 횡포란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며, 폭풍우란 전쟁이라는 것을
수신과목 시험문제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든 황국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써라.’
‘①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②따라서 나는 소감이 없음’
교장선생님께 불려갔다.
“학생의 이런 행동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밝힌 것뿐입니다.”
교장 선생님의 손바닥이 내 뺨으로 철썩 올라왔다.
“이 놈아,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어? 너 하나의 이런 감정 표현으로 학교가 당할 고통을 생각이라도 해 보았나?”
“일인 고등계 형사들한테 들키지 않도록 숨기겠습니다. 고정하십시오.”
1941년, 내 나이 스무 살, 그해에 나는 동성 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입학한 곳은 동경에 있는 상지 대학 철학과였다. 이 무렵 일본 군국주의는 전쟁 준비에 광분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압제를 더욱 심하게 조이고 있었다. 곧 이 전해인 1940년 2월 창씨개명령이 내려졌고, 8월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으며, 10월부터는 황국 신민화 운동이 강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의 세력은 마침내 천둥 벽력을 일으켰다. 내가 예과 1학년이던 해(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져 갔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전쟁터로 내몰려는 책동도 시작되었다. 역사에도 부끄러운 정신대라는 이름이 이때 생겨났으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전쟁터로 나가 피를 흘렸다. 더욱이 그들은 1942년부터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하게 하였을 뿐더러 쓰지도 못하게 했다. 1943년에 가서는 학생들에게 학병제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아아, 어머니
내 나이 스물두 살 때(1941년) 나는 군 혼련을 받으면서 사람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조금씩 넓혀 나갔다. 그러니까 참기 힘든 고통도 마치 밤이 가면 새벽이 오듯이 인내하면 다시금 새날이 밝아 온다는 것을 이때 체험했다. 또 목마른 다음에 맛보는 한 잔의 생수는 얼마나 단 살맛을 주는가를 이때 배웠다.
아아, 어머니, 나는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마음에도 싫고 몸에도 고통스러운 군 생활을 이겨 냈다. 맏아들을 찾으러 세 번이나 황량한 만주 벌판을 헤매고 다니신 우리 어머니, 간도의 연길, 용정을 비롯하여 멀리 하얼빈까지 그 연약한 여자 몸으로 찾아다닌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받는 고통쯤은 어머니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겨 내었다.
그렇다. 엄동설한의 그 매서운 추위에도 푸른 기상을 잃지 않는 소나무를 보면 가슴이 펴지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서 군 훈련을 마쳤다.
1945년 1월, 내가 배치 받아 간 곳은 일본의 남쪽에 있는 부도라는 섬이었다. 다행히 그곳에는 접전이 없어서 나는 간혹 산으로 올라가서 묵상도 하곤 했다. 전쟁은 사실 인간들의 다툼일 뿐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흰 구름은 한가로웠다.
이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엽서>라는 시가 떠오른다.(226쪽)
천막 밑에서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파란 하늘 속에
눈부시게 피어오르던 꽃은
피기도 전에 시들어 가는
한 떨기 요란한 포화
여름의 하루 낮은 기울어 가는데
그런데 막상 죽을 위험이 임박해 오니 정반대가 된 내 자신을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가 못 견디게 보고 싶고, 어머니 품에서 죽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로메로> 라는 영화에서 사람이 사람을 고문해서 죽여 놓은 처참한 장면이 나온다. 그때 시체를 끌어안고 로메로 주교님이 이렇게 절규한다.
“사람이란 말이냐! 사람이란 말이냐!”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되었다. 곧 얻어먹고 다니는 사람이든,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이든,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식이므로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사람을 집에서 기르는 가축보다 못하게 다루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고서 짐승보다 더 포악하게 변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전장이 바로 그런 것을 처절히 볼 수 있는 곳이다.(230쪽)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일본의 패배는 우리 민족의 해방이었다. 36년 만에 일본 속국으로부터 벗어나는 독립이었다. 광복절 노랫말처럼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그 당시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느낀 감흥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곳에 함께 있던 우리 한인 출신 노무자들을 비롯한 학병들과 일인들 사이 반목이 폭발해 그 뒷정리가 필요했고, 괌도에서 진행된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도 서야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해방 이듬해가 되어서야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되어 어머니를 포옹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어머니 품에 안겼지만 그때는 내가 어머니를 안았다.
어머니는 눈물 젖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감사 인사드리러 갈 데가 있다.”
나는 어머니 뒤를 따랐다. 어머니가 나를 감사 인사드리러 데리고 간 곳은 대구 주교관 옆에 있는 성모 동굴 앞이었다. 그때 기도하고 있던 분들이 너도나도 우리 어머니 주위로 모여들며 말했다.
“아, 군에 갔다던 아드님이 살아 돌아오셨구먼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러 오시더니만 정말 성모 마리아님의 은혜를 입으셨습니다.”
“젊은이, 어머니가 지성으로 드린 기도 덕분에 살아온 줄 아시우. 여기 성모 동굴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치고 젊은이의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우.”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기쁨 어린 눈으로 말하였다.
‘아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부모치고 자식 무사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기도를 들어주신 우리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자.’
1946년 9월 가을 학기부터 나는 일본 상지 대학에서 하다 만 공부를 서울 성신 대학에 편입하여 계속하게 되었다. 동족상잔의 전쟁 중인 1951년에 졸업하면서 9월 15일에는 대구 계산동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식이 있었다.
그해 69세로 자식이 신부 되는 게 꿈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동한 형님 다음으로 막내인 나마저 신부가 되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나는 1955년 6월에 대구 교구장 비서에서 김천 황금동 성당 주임 신부로 옮겨 갔다. 거기서 1년 조금 넘게 사목일을 보다가 이듬해 늦가을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부터 7년 동안 참으로 된장국과 김치가 먹고 싶던 그 기간에 나는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힘든가를 체험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그것도 탄압 받던 어두운 시대에 왔었던 선교사 신부님들을 떠올리며 많은 것을 생각하였다.
1963년 11월 하느님의 ‘너, 어디에 있느냐?’에 ‘이제 고국으로 갑니다.’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나는 가톨릭시보사 사장 소임을 맡아서 2년여 동안 일하게 되었다.(사형수 최월갑의 이야기 생략)
1966년 5월 마산 교구장으로 내려가 2년 동안 일하고 1968년 4월에 서울 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4월 30일에 로마 교황이신 바오로 6세로부터 추기경으로 피임되었다. 내 나이 그때 47세로 당시 전 세계 136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자라고 해서, 그리고 한국 천주교 사상 최초의 추기경이 나왔다고 해서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힘이 들게 마련인데 나는 오직 하느님이 나를 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내가 신부 서품을 받던 첫 마음 때처럼 나를 비우는 일을 끝없이 계속함으로써 나 자신을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해 왔다.
“인간은 모든 육적인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독 정신적으로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자는 누구입니까?”
“네덜란드 신부님이 쓴 책 가운데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어요.~~중략”
“인간이 끝까지 지켜 가야 할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자기 아닌 남을 도울 줄 알고 배신 아닌 신의를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인간 본연의 삶이다. 인간에게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영적인 삶이 없이는 인간으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본다.
하느님이 ‘너, 어디에 있느냐?’ 고 했을 때 ‘네, 여기 촛불로 있습니다.’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한 사람의 꿈은 그냥 꿈으로 나을 수밖에 없지만 모인 사람들의 꿈, 곧 빛의 어우러짐은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먼저 꿈을 가지고 그 꿈이 전파되고 점차 확대되어 그날의 촛불 행진처럼 강물 되어 흐르면 현실화되지 않던가요?
“사람한테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추기경님께서 동행한 작가에게 드린 질문)
“몸만 자라고 마음은 자라지 않는 식물인간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설리춘색(雪裏春色)이라는 말이 있어요. 눈 밑에 이미 봄이 와 있다는 말인데요. 고통 속에도 이미 기쁨이 와 있다고 믿고 이겨 내는 것, 그것이 참인간의 길이지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과 정채봉 작가의 글을 담은 ‘저 산 너머’를 감동적으로 읽었다. 2020년 봄 영화로 제작된 ‘저 산 너머’를 보았지만 책을 통해서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작가의 표현 하나 하나가 문학적이고 마음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