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신유사옥)
제24기 20158133번 이정숙 마리아
신유박해 : 1801년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 천주교 4대 박해 가운데 하나로, 1801년 1월 10일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에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배경〕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無父無君의 종교로 인식,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성리학에 입각한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위협, 정치 세력들 간의 대립과 갈등,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내세워 채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남인이 주도권 장악,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 김씨를 비롯한 노론 벽파는 이들을 앞세워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하고자 함
〔전개과정〕1800년 6월 28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 정책을 폈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해짐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게 된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고 함
서울에서의 박해 : 1800년 12월 17일 중인 최필공(토마스)이 체포되고 19일에는 최필제(베드로)가 1801년 1월 9일 최창현(요한)이 체포됨 대왕대비 김씨는 1월 10일 공식 박해령을 내림 이런 상황에서 명도회 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 궤짝 사건이 1월 19일 발생, 2월 9일에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을 국문하기 시작, 11일에는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정약종을, 14일에는 정약전을, 16일에는 이기양을 의금부에 가둠 이들 가운데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등 5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과 신지도로 유배당함
경기도 충청도에서의 박해 : 내포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2월5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사형선고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 당함, 2월 26일 경기도 포천지방의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아들 홍인(레오)과 정약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1801년 3월 13일 여주 성문 밖에서 원경도(요한), 임희영,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정종호 등 5명이 처형 4월 2일 정철상(가롤로), 최필제, 정인혁, 윤운혜, 정복혜, 이규합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박해 확산 : 3월 12일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박해는 더욱 가열, 4월 19일 주문모 신부는 군문 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 주문모 신부를 궁 안으로 피신시킨 송마리아와 신마리아가 3월 17일 사사, 5월 22일 주문모 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과 궁녀 강경복, 문영인,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김연이 현신애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전라도에서의 박해 : 전주에서는 3월부터 박해 시작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박해 초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은 9월 11일 사형선고 받고 처형당함
〔백서사건〕황사영이 충청도 베론으로 피신하여 김귀동의 집에 은거한 뒤 그곳에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한 박해 과정을 기록하면서 교회의 재건 방안을 구상함. 황사영은 8월 26일 황심을 만나자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고 함. 이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는데 11월 5일 황사영, 옥천희, 한계흠이 처형당하게 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됨.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단락되자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를 박해한 일을 종묘에 고유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 즉 척사윤음을 12월 22일에 반포함 황사영이 전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서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을 합하여 300여명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함
〔의미와 영향〕
첫째 : 조선 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를 거의 폐허화시켰고, 어렵게 영입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35년간 목자 없는 교회가 됨
둘째 : 신유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됨,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의 산간 지방으로 숨어 계속 복음을 전하였고 죽음을 앞둔 신자들의 용기와 귀양 간 이들의 인내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조선의 구석진 시골까지 천주 신앙이 빠르게 전파됨
셋째 : 신유박해를 거치면서 천주교가 민중 신앙으로의 자리를 굳히게 됨, 양반 신자들 대부분이 순교 또는 배교하고 귀양 감에 따라 스스로 양반 지위를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신분층이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됨
넷째 : 황사영 백서 내용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無父無君의 패륜적인 종교라는 인식에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더하게 되어 발달된 서양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됨 이 때문에 조선의 과학 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됨
다섯째 :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대왕대비 김씨를 비롯한 벽파는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채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남인 공서파를 이용하여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하게 됨<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8권 5447~5451쪽>
〔과제 후 느낀 점〕
첫째 : 천주교에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펴왔던 정조가 승하하지 않았다면 한국 천주교회가 좀 더 편안하게 복음을 전파하며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서양의 과학 기술을 조기에 받아들여서 국가 발전을 앞당겼을 것이다.
둘째 :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선조들의 피흘림이 있었기에 오늘날 천주교인들은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복음을 전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집안에서 내가 가장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여 시댁 5남매 30여명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친정 형제들 두 명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많은 형제들이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기도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다. ‘선교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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