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4대 박해

병오박해(丙午迫害)

기도하는 어머니 2016. 2. 23. 23:07

병오박해(丙午迫害)

제24기 20158133번 이정숙 마리아

병오박해 :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하나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되어 9월 20일에 종결되었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모두 9명으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에 모두 시성되었다.

[발단과 전개과정〕

1839년 기해박해가 끝난 이후 1840년대 중반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해 척사윤음이 박해의 법적 근거가 되었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다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한 ‧ 중의 국경 감시가 엄해졌고 외국 선교사들은 육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가 없게 되었다. 1845년 김대건 신부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때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해로는 매우 위험했으므로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되자 김대건 신부에게 장차 중국에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입국할 수 있는 해로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지시에 따라 마포 ‧ 연평도 ‧ 백령도를 항해 하면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자신이 그린 해로도를 중국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 임성룡, 사공 엄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6월 10일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6월 20일에는 이곳에서 네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임치백, 김중수 등이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포도청에서 7월 19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으며, 현석문 ‧ 남경문 ‧ 한이형 ‧ 김임이 ‧ 이간난 ‧ 우술임 ‧ 정철염 등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의 문초에서 중국의 광동 출신 우대건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에서야 비로소 용인 태생 김대건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였음을 실토하였다. 그러나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함께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권면하는데 힘썼고, 선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에게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었다.

〔순교와 시성〕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클레오파트르호, 빅토리외즈호 ,사빈느호 등 군함 세 척이 충청도의 외연도에 나타나 편지 하나를 조선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다. 세실 함장은 기해박해 때 조선에서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해 항의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충청 감사의 장계로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대건 신부도 옥중에서 판관으로부터 이 사실은 전해 듣게 되었다. 세실의 조선 원정이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고 김대건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판결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한강변의 노들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만 25세였다. 그로부터 3일 뒤인 9월 19일 현석문이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같은 날 장사로 순교하였다. 병오 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겪어 온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마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일시 활동을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1801년이나 1839년의 박해 때처럼 새로운 척사령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이들의 순교 행적은 페레올 주교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었고, 1846년 11월 3일자의 서한 즉 <병오일기>에 담겨져 홍콩으로 보내졌다. 이 자료는 그곳에서 다시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최양업 부제가 번역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었으며, 이후의 시복 절차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9명의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1925년 7월 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명과 함께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 : 한국 가톨릭 대사전 5권 3412~3414쪽>

〔과제 후 느낀 점〕

첫째 : 김대건 신부와 같은 방인 사제가 오랫동안 살아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실사구시의 서양학문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면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도 훨씬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조선 정부는 영리하고 해박하며 지혜로운 선각자들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고 그들의 생명을 무참하게 다루어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였는지 그래서 조선이 그렇게 일본에 패망하였는지도 모른다.

둘째 : 한국천주교회사 과제를 수행하면서 난 천주교 4대 박해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어찌하여 순교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주님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공부하면서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값진 교회임을 자각할 수 있었고, 후손들에게 이 귀중한 신앙을 전해주기 위하여 조상들이 피의 순교를 하였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순교를 해야 할까? 고심하게 되었다. 물질만능, 과학과 기술의 발달, 쾌락주의와 한탕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서 가난하고 겸손하고 정결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보여주는 백색의 순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모님이 신자이면서도 자녀들의 신앙을 관리하지 않아서 냉담자가 속출하고 이단과 이교로 빠져들어도 그들의 생각을 되돌리려 하지 않고 가족과 친인척이 교회 밖에서 방황하고 헤메고 있음에도 안일무사하게 내 마음의 평화나 유지하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는 살아계신 성인들과 주님에게 얼마나 치욕적인 행위가 될 것인가? 깊이 반성하고 뉘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순교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이웃의 구원을 위해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수행하리라.